앤코이에게 전합니다

4기 선발자: 앤코이 교육재단의 놀라운 힘, 그 예외적 사랑을 통해 저는 그간 받아왔던 모든 사랑들이 일깨워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서** 2023-09-21 09:59 조회수 아이콘 263

<사랑받았다는 마음>


앤코이 교육재단의 사랑을 받기 전까지, 그리고 앤코이 교육재단이 단지 미래인재에게 투자하는 측면을 가뿐히 뛰어넘어서 제가 저만의 길을 걷게 된 맥락과 그 정신들을 하나하나 낱낱이 이해하고 공감해주시는 눈물날 정도로 정말 고맙고 경이로운 선물을 받기 전까지, 저는 제가 단지 홀로 이 악물고 성공해야 하는 외로운 자수성가형 청년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제가 받은 사랑을 잊고 있었고, 저를 지탱해주는 수많은 인연들 사이에서 외롭지 않다는 것을 잊고 있었고, 앞으로 걷는 길에 늘 귀한 인연들이 등장할 것이라는 당연한 희망도 잊고 있었습니다.

앤코이 교육재단이 저에게 보내주신 사랑은 그것 자체로도 경이로운 것이었습니다. 저의 지도교수님보다 더 정확하게 제가 가고자 하는 길과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해 주셨고, 그 참된 동기를 헤아려주셨으며, 앞으로 이 길을 가도 된다는 것을 진정한 이해와 동감으로 격려해주셨습니다. 앤코이 교육재단의 더욱 놀라운 힘은, 그 예외적 사랑을 통해 제가 받았던 기존의 모든 사랑들을 회상시켜 주시고 일깨워 주신 것이었습니다.

불 붙은 하나의 성냥이 한 줌의 마른 성냥들을 일시에 발화시키듯, 앤코이 장학재단이 건네주신 혜성처럼 예외적이고 지도교수님처럼 정확한 사랑은, 이 세상에 사랑이라는 것이 여전히 이렇게 값 없는 생명수 샘물처럼 도처에 존재함을 느끼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놀라운 위로로 어루만진 저의 마음은, 생활인으로써 쌓아올려야 했던 ‘생존투쟁 모드’를 해제하고 수용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주변을 돌아보며 내가 받은 사랑을 하나하나 다시 껴안고 감사케 하였습니다. 그리고 제 마음 속에 역시 존재하는 값 없이 사랑하고 조건 없이 베푸는 영적 삶을 다시 한 번 결심하고 새로운 마음으로 길에 오르도록 이끌었습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이미 여러 가지 사랑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를 이 세상에 초대하신 부모님과 길러주신 양육자의 근본적 사랑 위에서 우리는 개인의 역사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뭇 사람들을 평등하게 사랑하는 마음으로 여러가지 훌륭한 제도와 기술들을 개발해 준, 우리가 미처 다 알지 못하는 이념가들과 행정가들과 과학자들과 기술자들과 육체노동자들의 사랑 덕분에, 우리는 아주 쉽게 깨끗한 물과 풍요로운 동식물 품종들, 놀라운 편의성과 훌륭한 식사들을 매 끼니에 얻을 수 있습니다. 이 사회가 인간의 이익 추구와 이기심에 의하여 돌아간다는 견해가 제 아무리 널리 퍼져 있다고 할지라도, 인간이 타인과 협력하고 타인을 위해서 살아가는 인간의 본원적 사랑 덕분에 우리 모두가 살아있다는 사실은 변경되지도 퇴색되지도 희석되지도 않습니다.

이런 아주 평범하고 지속적이고 기본적인 사랑을 우리가 매일 계속해서 자각하기는 사실 쉽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한 연인을 오래 만나도 가슴 두근댐이 멈추지를 않아서 심장에 무리를 느낄지도 모르기 때문에, 어쩌면 둔감화(Desensitization)란 생물의 기본 적응 능력 중 하나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런 사랑의 둔감화는 우리가 때로 침체되어 있을 때 그 침체에서 빠져나오기 어렵게 하는 원인이 되곤 합니다. 우리는 이미 많은 사랑을 받고 있지만, 태어난 것 자체가 어마어마한 사랑의 결실이지만, 살면서 적응을 위해 일상적 사랑에 둔감화된 이후에 일상 속 매너리즘에 빠져들게 되면, 새롭고 특별한 사랑을 받지 않는 한, 우리는 쉽게 내가 혼자가 아닐까라고 하는 자체적으로 구원하기는 힘든 생각에 빠져들기 쉽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때, 창문 바깥에서 불어 온 산들바람이 꿈을 깨우듯, 아주 예외적인 곳에서 온 사랑이 우리에게 도처에 사랑이 있었음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우리가 상상하지도 못했던, 내가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지도 않았던, 어마어마한 은혜와 사려깊은 관심 그리고 배려로 보듬어진, 아무 조건 없이 나라는 존재 그 자체에 건네어진 선물 같은 사랑…. 바로 앤코이교육재단의 너무나 놀라운 예외적 사랑이 바로 그것입니다.


앤코이 교육재단이 여러 지면에서 사랑과 의식성장을 강조할 때, 사랑으로 장학생들에게 메일을 보낼 때, 그 사랑이 세상에 금의 광맥처럼 잠재된 모든 사랑들을 일깨우고 있음을 느낍니다. 조건 없이 청년의 오롯한 삶과 그 청년이 다시금 이 세계를 위해 행할 사랑을 위한 사랑 – 앤코이 교육재단의 사랑을 다시 한번 선사받을 수 있게 되어 진심으로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사랑을 받았으니 이제 제가 사랑이 되고자 합니다. 앤코이 교육재단의 횃불로 점화된 사랑의 장작으로 살아가겠습니다.



“인간은 한낱 진화된 동물인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인류 공동체를 창조해나가는, 자유의지를 부여받은 영적인 존재”입니다.>


인간이 단지 똑똑한 동물에 불과하다는 견해는, 우리 인간에 내재된 무한함과 창조성을 부정하는 냉소입니다. 그리고 그 작은 냉소 한 번이 우리 사회의 상호신뢰를 천천히 해체시키는 균열로 발전할 수도 있습니다. 사회는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는, 오직 ‘서로가 약속된 시공간에서 기대된 행동을 하는’ 방식으로 유지되는 네트워크입니다.

우리가 직관 안에서 그 어떤 것도 별개로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무지만을 계속 반복한다면, 인간은 타인과 그리고 공동체와 정신적으로 절연처리(insulated)된 존재입니다. 

사회라는 네트워크는 자유의지를 건설적으로 활용하는 인간들의 참여로, 사회에 대한 공유된 신뢰를 가질 때에 존속합니다. 그 공통된 신뢰의 핵심은 ‘인간은 결코 단지 기계도 똑똑한 짐승도 아니며, 영적이고 도덕적이며 창조적인 존재’라는 지식을 넘어선 앎입니다.


만약에 누군가 그 신뢰를 저버린 채, ‘인간은 머리 좋은 짐승이다’라는 말을 믿는다면, 그 말을 믿게 된 사람이 먼저 상처 받게 됩니다.(비록 스스로는 인식하지 못할지라도.) 그 불신은, 그 주인이 본디 품고 있었던 인간으로서 발휘가능한 도덕적·정신적·영적 자율성· 창조성과 같은 ‘고차원적 의식(영성)’을 다음 2가지 중 하나의 방식으로 파괴합니다.

첫 번째 방식은, 인간은 짐승이기 때문에 도덕이나 창조성 같은 ‘고차원적 의식(영성)’은 아무 쓸모 없다는 견해를 갖게 하는 것입니다. 원인이 있어야 결과가 있는 것처럼, 오늘날 존재하는 약탈·착취·불공정계약·폭력·지배 등 일체의 반사회적 행동들 역시 그것이 생겨난 원인이 있습니다. 그 원인은 ‘인간의 정신은 짐승이라는 본질 앞에 쓸모없다’는 견해가 사람들의 마음 속에 파고들어 서로가 본디 갖고 태어난 ‘양심’과 ‘타인과의 연결감(공동체 의식)’을 거짓이라고 느끼게 한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다 똑똑한 짐승일 뿐이므로 즉, 똑똑한 머리를 가지고 짐승의 욕망을 가졌을 뿐이므로, 나 역시도 그렇게 되어도 상관없다는 믿음은… 그렇게 믿는 자기 자신을 가장 먼저 그렇게 만듭니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의 방식은, 인간이 자신이 생겨난 그대로 아무런 성찰 없이 살아가는 생체(짐승) 기계라는 견해를 갖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명시적인 방식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천진난만하지만 밑도 끝도 없이 공허한 의문을 심어주는 방식으로 인간의 ‘고차원 의식(영성)’을 흔들어 놓습니다. 우선, 명시적인 방식은 단순하고 분명합니다. 자꾸만 인간이 생로병사를 가지고 태어났음을 강조하며, 삶은 허무한 것이고 또한 기계적인 세상의 틈바구니에 끼여 어쩔 수 없이 부품처럼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견해를 믿게 만드는 것입니다. 누군가 이 견해에 빠져들기 시작한다면, 그는 아무런 의미의 닻(근원)도 주어지지 않은 우주에 태어나게 되었다는 사실에 우울해지거나, 아니면 단지 우울에서 끝나지 않고 ‘보상받을 길 없는 공허감’에 휩싸여 세상에 대한 추상적인 적대감을 가지게 될 수 있습니다. 공허감을 달래기 위해 중독과 쾌락에 탐닉하는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그것은 자기파괴와 자기보다 더 약한 사람에 대한 폭력으로 이어지기 일쑤입니다. 내가 더 큰 존재와 연결되어 있고, 이 세상 전체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사람은 ‘방황하는 칼날’과도 같습니다.

자꾸만 사람들은, 깨어 인식(awareness)하는 대신에, 건설적인 창조와 결단 대신에, 자꾸만 답을 찾아 헤매입니다. 내면에서 답에 연결될 수 있음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상위자아를 통하지 않고는 자신이 태어난 이유에 대한 완전한 이해를 얻을 수 없을 것이고, 만약 상위자아를 통해 이해를 얻었다면 그 때부터는 지금-여기 이 순간에 현존하며,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자신의 창조성을 건설적으로 발휘하며, 항상 그 이상으로 나아가겠다는 의지와 방향성을 찾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신의 뜻과 일치된(신을 알건 모르건 간에), 진정한 자신의 뜻 즉, 진정한 만족감을 가져다 줄 의지를 발휘하는 선택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존재 의의를 자꾸만 타인에게서 찾는 사람은, 자신에게 답을 던져 준 그 타인의 정신을 되풀이하는 이념적 복사기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개인에게도 안타까운 일이지만, 개개인의 ‘정신적 · 의식적 개벽(開闢)’을 통하여 반복되는 비극의 고리를 끊어버리고 더 성숙한 정신문명을 건설해야 하는 우리 인류문명 전체에게도 비극입니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입니까? 다음 두 가지 조건을 갖춘 사람을 길러내는 것입니다.

첫째 - 실사구시(實事求是)의 눈으로 우리의 육체 · 우리 세계의 물질성이 인류에게 주는 존재의 닻(물리적 조건)을 중립적인 과학적 관찰을 기반으로 보는 눈을 가지며,

둘째 – 내면의 (에고와 동일시 되지 않은)순수 의식을 상위자아를 통한 전체와의 연결에 두고, 지금-이곳 내 앞에 펼쳐진 세계의 기쁨·슬픔·비극·희망을 있는 그대로 관조하는 것입니다.

인간과 세계의 물리적인 조건을 파악하되, 나의(인간의) 은 이 물질세계에 구속받지도 제한되지도 않는 자유로운 창조자라는 견해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개인의 양심이 깨어날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는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커다란 만족과 행복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물론 인간의 양심이 자신의 판단과 이원성의 무지에 따라, 천사의 편을 들 수도 악마의 편을 들 수도 있겠습니다만, 인간 내면에 내재한 영성(인간의 삶에 있어 가장 높고 본질적인 부분)은 인간이 도저히 없앨 수 없는 본질이고, 그렇기에 시간이 걸릴 지언정, 영을 통해 끊임없이 진정한 자기초월을 향하는 인간의 역동성을 통합하고자, 고귀하고 높고 선한 것을 추구하는 삶의 실재를 가로막을 수단은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인류의 정신을 ‘구체성과 창조성’을 발휘하는 ‘정신적 삶’을 추구할 수 있도록 촉진하고 모셔내고 섬겨내는 것을 제 삶의 유일한 사명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 수단은, 제가 2014년 세월호 참사 앞에서 처음으로 뜻을 세운 후, 지난 9년간 훈련받아온 전문기술인 ‘임상심리학’과 ‘상담심리학’ 그리고 ‘사회복지학’입니다. 저는 가장 중증의 심리적 어려움을 연구·치료하는 임상심리학을 통해 어려움에 처한 마음을 가장 깊은 층에서부터 이해하고, 각자가 이미 지니고 있는 본디의 평안한 마음상태로 돌아가서 각자의 고유한 ‘창조성과 도덕성’ 그리고 ‘고차원적 의식(영성)’을 발휘하실 수 있도록 섬기고자 합니다.

임상심리학자는 인간의 정신적 어두움을 다루는데, 이것은 인간의 밝음과 인간의 원리를 이해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모든 정신적 반응은 스펙트럼 상에 있기 때문입니다. 가령, 불안이 완전히 없는 사람도, 불안으로 가득한 사람도 모두 건강하다고는 하기 힘들 것입니다. 건강한 불안을 적재적소에 사용하고, 불안이 필요하지 않을 때 평온할 수 있는 사람이 건강하겠지요. 이렇게 일순간 일별(glimpse) 되는 인간 정신의 특징적 순간을 포착하고, 연구하고, 치유하기 위하여 ‘임상심리학’ 석사과정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같은 까닭으로, 저는 임상심리학 기술을 실제 도움이 필요한 한 분 한 분께 알맞은 방식으로 전달하고 적용할 수 있게 하는 전문상담사 훈련을 받고 있으며, 그러한 전문 심리서비스가 구매력이 부족한 취약계층 분들께도 골고루 전달될 수 있도록 사회복지사 실무훈련 역시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그 모든 학문과 기술들이 인류의 ‘의식 성장’에 기여할 수 있도록 모든 낱낱의 기술들을 하나의 서비스로 통합하는 기획자이자 프로그램 진행자의 역량 역시 쌓아가고 있습니다.


기나긴 과정이겠지만, 어떤 슬픔과 배고픔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상처받고 무너진 분들을 돕는 직업이고 큰 돈을 벌기 위한 목적은 아닙니다. 하지만 청빈하고 단촐하게 살아갈지언정, 도움이 필요한 누군가를 위해 공부하고 헌신하고 섬길 수 있는 기쁨을 허락받았다는 것은 축복이라 생각합니다. 


다시 앤코이교육재단에 대한 주제로 넘어와서, 앤코이장학재단이 장학사업의 계기로 ‘의식 성장’을 꼽는 것은 진심으로 감동적이고 환희에 가득찰 만큼 기쁜 일입니다.

홈페이지의 <앤코이가 말합니다> 코너를 읽다 보면, 정말 하나하나의 글에 모두 공감과 동감이 되었습니다. (특히 『 VI) 가정폭력피해가정에 앤코이가 사랑을 담아 드리고픈 메시지 ♡ 』 글은 개인적으로도 참으로 위로가 되었고 감사했습니다)

앤코이의 웅숭깊은 글을 읽다 보면, 앤코이는 단순한 장학재단을 넘어서 깊은 뜻과 드높은 이념을 함께 하는 동료이고 벗이자 도반처럼 느껴집니다.



<에고 바깥으로 – 영성으로>

앤코이 교육재단, 『 XIX) 에고란 무엇인가요? 』를 읽고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상 만물에는 양면성이 있다고들 합니다. 물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생명체는 없지만 물을 너무 많이 마셨을 때도 위험한 것 같이, 우리에게 필수적이고 소중한 것에도 양면성은 존재합니다. 에고(자아)란, 다름아닌 우리 생존을 위하여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지 우리의 본질이 아님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로서의 응집력을 가져 마치 '이것이 사라지면 내가 죽을 것만 같고, 삶을 정상적으로 살 수 없을 것만 같아 보이는' 환영이자 에너지입니다.

에고는 우리에게 한 가지 기회를 제공하는 척 하면서 한 가지의 위험을 더해줍니다. 우선, 에고는 우리 자신을 보호하고 지키려 스스로 주인 행세를 합니다. 우리가 절대로 깨어날 수 없게끔 모든 수단을 동원하죠. 사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에고가 없어도 우리는 자신의 육체를 안전하게 다루고, 밥을 챙겨 먹고 경제활동을 하며, 미래에 ‘내가’ 하고자 하는 바를 더 잘 이룰 수 있습니다 (에고는 수많은 분리된 자아의 구성물일 뿐이지 사실상 실체가 없기 때문에). 심지어 에고에 의해 휘둘릴 때보다 더 잘 해낼 수도 있습니다. ('세상의 왕자'와 에고는 그대가 이것을 절대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려 들겠지만요~) 우리가 삶에 부여 받은 에너지를 자신이 원하는 대상을 향해 사용하고 실제 선택해야 하는 것은 에고가 아니라, 진정한 창조력을 발휘하는 우리의 순수인식, 영(spirit)입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에고와 동일시 되지 않아야겠지요.)

에고를 비롯한 우리 안에 수많은 자아들은 ‘마음의 중력’과도 같습니다. 중력으로 뭇 생명들이 대지에 발을 붙이고 삶이 가동되는 것처럼, 의식의 단계 144단계를 넘어서게 되면 우리는 지구에 더 이상 머무를 수가 없게 됩니다. (앤코이에서 말하듯, 인생 졸업을 말하죠.)

이처럼 일부 자아는 생명과 삶의 구심적이자 접착제이기도 하지만, 에고는 지금까지 우리 각자의 삶과 세계사가 겪은 많은 안타까운 일들을 촉발시킨 원인이기도 합니다. 에고가 너무 강해진다면, 우리 마음속에는 타인과 이 세계 전체의 보이지 않는 맥락이 헤아려질 수 없습니다. 이 세계는 우리 육체와 다른 나머지 모든 것들 간의 경쟁과 투쟁으로만 이뤄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어떠한 일들이 자연스럽게 처리되는 상황 속에서, 육체와 자아를 통제하여 내 차례가 오기를 묵묵히 기다려야 하는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오직 자기 자신만의 욕구와 욕망을 참조하는 에고는 보이는 것 너머를 볼 수 없고, 연결성을 알지 못하며, 전사회적·전우주적 맥락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삶도 언젠가는 끝나게 되고,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 찰나의 순간을 살아가는 ‘나’에게 그렇게까지 집착하고 매달릴 필요는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나에게 피해를 준 어떤 사람을 너그럽게 용서하거나 그런 일을 잊어버릴 수 있는 옵션이 언제나 존재한다는 것도, 지금 내 한 몸을 불리고 치장하고 영생을 갈망하는 방식으로는 정말 영원한 부귀영화를 누릴 수 없다는 사실 역시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영원한 부귀영화 자체가 에고의 공포와 결핍이 억지로 만들어낸 집착의 덫이라는 사실 자체를 에고 자신은 통찰할 수 없습니다. 그 통찰은 에고를 그저 일시적으로 입고 있는 옷으로 보는, 전체로서의 나(real self)만이 가능합니다.

세계대전에서 포탄의 궤적을 계산하다가 컴퓨터가 발명되었다 하여 컴퓨터를 발명한 세계대전을 칭송하기 어려운 것처럼, 에고가 우리에게 늘 자아의 감옥이라는 위험을 제공하는 한, 어떻게 하면 에고와 동일시되지 않으면서도 현실을 살아가고 일상생활에 균형을 가져올 수 있을지 초점을 두는 게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진정한 자신'이 '에고'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에고와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곤 합니다. 그래서 에고가 위험하다고 할 때 전쟁을 준비하고, 에고가 자존심 상했다고 할 때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려고 하며, 에고가 저것이 꼭 필요하다고 말할 때 그것을 쟁취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사실 에고는 나를 구성하는 여러 가지 장치 가운데 하나일 뿐, 나 자신이 아닙니다. 만약 에고가 나 자신이었다면, 화날 때 즉시 으르렁거리고 기쁠 때 즉시 헥헥거리는 강아지처럼 에고와 나 자신 간의 대화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음속에 떠오르는 에고의 말들을 들을 수 있고 그것과 대화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에고가 곧 자신이 아니라는 증거입니다.

에고 역시 이 세상을 해석하고 나에게 행동과 판단의 제안서를 올리는 마음의 작은 엔진에 불과하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에고의 말이 굉장히 위협적으로 느껴지는 상황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습니다. 재단에서는 이것을 ‘에고와의 동일시 해체’라고 언급해 주셨습니다. 

'앤코이가 말합니다' 게시글에서는 인생을 졸업하기 전 상위 가장 마지막 단계에서도 자아나 환영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고 말해 줍니다. 재단은 이와 관련해 더 확장된 이해를 제게 주셨습니다.

우리 마음속의 이러한 수많은 자아의 목소리들을 알아차리는 순수자아를 통해서, 우리는 에고와 동일시 되지 않고도, 몇몇 자아들을 마치 주인이 하인을 부리듯이 '활용'하는 수준으로(오히려 에고와 동일시하던 때보다 더 훌륭하게) 일상생활을 효율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가능하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나마스테'라는 인삿말이 주는 깊은 이해처럼,(나마스테: "내 안의 신께서 그대 안의 신께 인사합니다."-인도, 네팔 등에서 만날 때나 헤어질 때 주고받는 인사말에고의 독단적 해석이 만드는 허구의 시뮬레이션에서 빠져나와, 상위자아에 접속할 때, '모든 사람에게 그것이 가능함'을 저도 경험한 적 있습니다.

에고는 진정한 나 자신이 아니고, 생각은 진실이 아니라 단지 알 수 없는 세계의 실상에 대한 나의 해석이며, 실질적 나는 내 피부 안의 전체와 피부라는 경계를 넘어 여러 인연으로 연결된 나를 존재할 수 있게 해 주는 나를 둘러싼 모든 것(사실상 세계 전체로서 장(場, field))임을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에고의 틀 바깥으로 걸어나가 진정한 전체 세계의 실상 위에 편히 떠올라 삶이 본질적으로 자유임을 느끼는 길일 것입니다.


앤코이장학재단이 세상에 전달하는 메시지들과 관점 전환 · 의식 성장의 계기들에 저 역시 공감하는 취지에서, 마치 앤코이가 핵심가치 중심의 자유주제로 <앤코이가 말합니다> 코너에 글을 올리셨듯, ‘제가 정말로 이 세상에 드리고 싶었던 메시지’를 주제로 하여 <세전메> 영상을 녹화하였습니다.


<마치며, 재단에 전하는 말씀>

"앤코이장학재단의 장학담당관 선생님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존경의 마음을 담아 다시 한 번 인사드립니다.

앤코이 장학재단은 참으로 놀라운, 이 시대의 진정한 어른들이 계시는 곳입니다. 왜냐하면 앤코이 장학재단은 단순한 장학생 육성의 역할을 넘어, 훌륭한 질문을 던지고 또한 깊은 질문에 응답하기 위해 삶 전체를 헌신하는 청년들을 발굴하는 시대정신의 등대와 같은 곳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장학재단이 장학생의 영어점수와 대학성적을 물을 때, 한 인간의 의식 성장과 인류공동체의 발전을 위해 심오하고 깊은 질문을 던져주시는 앤코이장학재단 담당자님들의 그 웅숭깊은 정신이 저는 너무나 놀랍고 감사했습니다.

2년 전, Noble희망장학금 2기 모집에 지원했을 때, 그리고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은혜를 입었을 때, 저는 가슴이 터질 듯 감사했습니다. 그 감사의 마음은 지금까지도 가슴 깊숙히 자리잡아 환하고 뜨거운 물결로 요동치고 있습니다.

저의 꿈은, 엄격한 석사과정 훈련을 완료하고, 따듯한 마음과 총명한 두뇌를 갖춘 심리서비스 연구-실천가가 됨으로써, 이 세상에 슬픔을 닦아내고 기쁨을 불어넣으며, 제가 감히 모실 수 있는 모든 분들과 함께 더 높은 의식으로 성장해나가는 것입니다. 삶의 마지막까지, 인류의 의식성장을 도모해온 앤코이 장학재단의 뜻과 정신을 이어나가는 노블인으로 살아가겠다는 다짐으로 글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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