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기 선발자 세전메: '얼룩진 옷을 입은 아이'(애니메이션 영상)
정** 2023-09-24 02:52 313
앤코이의 말씀은, 제가 접해본 그 어떤 자기계발 지침서와 조언보다도 더 깊게 와닿았습니다.
<세전메 얼룩진 옷을 입은 아이>
(*정ㅇㅇ양께서 이 세전메 영상을 유투브 '전체 공개' 게시하는 것에 동의해 주셨습니다. 자발적 기여와 나눔, 재단에 대한 헌신, 개방성에 깊이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우리 주변엔 과거에 속박된 채로 과거에 쫓기는 사람들이 꽤 존재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가 ‘얼룩진 옷을 입은 아이’를 제목으로 정한 배경과 이유에 대해 첨언하고 싶습니다.
영상을 제작하면서 제 인생의 과거를 한번 돌아 봤습니다. 공포와 불안에 맞서는 방법을 몰랐던 어린 시절. 그 때 겪었던 부정적인 경험들이 흔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어렸을 적 당시에는 나를 극한의 불안으로 몰아 넣었던 것들이, 사실은 너무나도 별 게 아니었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 쇠창살 안에서 벗어났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여러 세월을 겪으며 더 크고 위험한 불안을 마주하느라 더 단단해진 것일까요.
사실 좀 더 직관적으로 말해서, ‘짐을 짊어진 아이’ 가 공포와 불안의 무게를 표현하기에 더 알맞은 제목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각자에게 주어진 자기 몫의 짐을 지고 살아갑니다. 이 영상은 그런 우리 자신들을 위한 메시지입니다.
짐은 제 불안의 근원이기도 했습니다. '앤코이가 말합니다'에서 언급되는 '에고'도 제게 짐처럼 무겁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이 영상을 제작할 때는, 보는 사람들에게 짐보다는 좀 더 가벼운 표현으로 그들의 공포와 불안을 약간 비틀어서 표현해 주고 싶었습니다. 평생 짊어져야 한다면, 무겁지 않은 표현으로, 가장 가벼운 것에는 무엇이 있을까 생각했어요. ‘얼룩’이었습니다. 모두가 당연하게 입고 다니는 옷. 그 옷 위에 묻어 있는, 하나의 얼룩. 하지만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쓰면 쓸수록, 내 심리 안에서 점점 확대되어 버리곤 하는 얼룩.
완벽함이란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얼룩을 가진 채 살아갑니다.
옷 위에 묻은 얼룩일 뿐이지만, 그 얼룩이 수치심과 자괴감이 되고 때로 상대에 대한 혐오로 이어지는 때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 얼룩 하나로 나와 상대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다는 것을 놓치고 그 얼룩만 유난히 확대시킬 때가 있습니다. 결국 얼룩에 자기 자신 혹은 상대를 동일시하며, 그 얼룩 하나로 사랑하는 모든 것을 망쳐버리거나 놓아 버리게 되는 일도 종종 있습니다.
주변을 자세히 돌아보다 보면 사랑하는 것들로부터 멀어져 존재를 부정하는 고통 속에 허우적 대는 사람들이 실은 꽤 있습니다. 저 또한 한 때는 그랬어요. 그래서 그들에게 더 말해주고 싶었습니다. 거기에 계속 머물러 있지 말고 이제 이동하라고요. 당신이 진정한 만족을 느끼고 사랑하는 것을 하라고 말입니다. 산책을 하는 것이던, 그림을 그리는 것이던, 글을 쓰는 것이던… 얼룩과 자신을 동일시 하던 것을 이제 멈추고, 진정한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주파수를 이동하시라고요.
'얼룩은 그저 얼룩일 뿐이였구나. 내 삶을 지배할 수 있는 것이 아니구나.'
이를 깨달으면, 얼룩이 묻어 있을지라도,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을 인정하게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그것은 그저 내 삶의 일부가 되어 돌아갑니다.
이를 좀 더 돕기 위해, 본질과 비본질을 구분할 줄 아는 것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얼룩은 외재적 동기에 의해 본질을 흐트리려 노력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계속 본질을 마주하고, 본질에 집중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만 원 짜리 지폐는 밟히고, 구겨지더라도 만 원입니다. 그의 가치는 변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가치는 이것 이상입니다. 아무리 얼룩이 묻어 있더라도, 여러분이란 본질은 변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늘 기억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저에게는 앤코이재단의 말씀이 삶을 선물처럼 살라고, 본질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들립니다. 요 근래 저는 이것이 더욱 와닿았습니다. 세상으로부터는 나의 행복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행복이라는 본질으로 가기 위한 열쇠는, 세상의 틀에 나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본질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더군요.
내가 가진 것들이 곧 나로 정의되어 버리곤 하는 세상입니다.
저 역시 타고났다기 보다는 노력하는 편이었고, 그 무엇 하나 내세울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간 완벽이란 이상에 집착하는 삶을 살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느덧 넘쳐 흐를 정도의 이상을, 욕심을 품 안에 끌어 안았을 때에는, 스스로 제 삶이 미워지기까지 했습니다.
은연 중에 알고 있으면서도 저는 제 욕심을 그간 외면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스스로를 좋아하기 위해서는 그 욕심을 억지로라도 붙들고 있는 것이 필요하다고 착각했던 적이 있습니다. '완벽’ 이라는 틀 안에 맞지 않는 상황을 수 차례 경험하면서도 놓을 수 없었던 시기가 있었죠.
그렇게 몇 십 년을 넘게 살아가다 보니 마음은 항상 불편했고 혐오의 화살이 늘 스스로를 향하곤 했었는데, 그런 상황에서 엔코이재단의 메세지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보이는 것 너머를 넘어 진정한 본질을 찾으라는 그 말씀이, 지금까지 불편한 감정을 해소하기 위해 찾아 봤던 그 어떤 자기계발 지침서보다도, 조언보다도 더 깊게 와닿았습니다. 간신히 들고 있었던 그 욕심들에 가려져 스스로의 모습은 제 삶에서 보이지도 않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죠. 그 이후로 비로소 조금씩 저를 직면할 수 있었고, 외재적인 -그렇기에 상대적이고, 완벽하지 않은- 틀에 들어가려 하는 것 보다 더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것들을 사유하고 찾아 나가는 데에 삶을 집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전히 불안정하게 실수한다 하더라도, 엔코이 재단의 메세지를 잊지 않고 오래 함께하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거추장스러운 것 없이, 있는 제 그대로를 바라봐 주시고 깨닫게 해 주신 앤코이재단이 있기에, 비로소 이 세상에 부끄럼 없이 존재할 수 있는 존재였음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조금 더, 지금보다 앞으로 나아가 보려고 합니다. 제가 그런 존재라는 것을 인식할 수 있게 도와 주셨으니, 의지만 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그 어떤 외부적, 내부적인 문제들에도 흔들리지 않는 저로써 ‘부끄럼 없이’ 존재할 수 있도록 저를 좀 더 사랑하려고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앤코이재단과의 만남이, 그리고 찾아올 이별과 또 다른 만남이 더욱 온전해질 수 있다 여기기 때문입니다.
날갯짓은 참 많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힘찬 도약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도약을 하기 위해 조금씩 날아 오르는 연습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저는 비행 방법을 배우기 위해 수도 없이 떨어지며 연습하는 어린 새들과 같은 과정에 있는 듯 합니다. 계속되는 실패와,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은 연습의 굴레가 단편적으로는 힘들어 보일지 몰라도, 그런 경험들이 쌓이고 쌓여 결국 날 수 있게 되듯이 반드시 마주하게 될 그 비상을 꿈꾸며 전해 주신 통찰과 사유의 순간을 잊지 않겠습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앤코이재단의 깊은 메세지를 접하고 각자에게 정말 중요한 본질을 깨달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래는 제가 생각하는 중요한 본질에 추가하는 제 의견입니다.
극단적인 페미니즘이 성행하고, 성별을 베타 및 알파로 나눠 우위 관계를 형성하는 레드 필 이론이 세간의 주목을 받은 것은 결국 외면적인 특성들에 초점을 맞춰 사람을 바라보는 문화가 일상이 되며 벌어진 일이 아닐까 생각하곤 했습니다.
여러 유형의 혐오가 너무나도 만연한 사회입니다. 어쩌다가 타인에 대한 혐오가 타인에 대한 관심이자, 변화를 촉구하는 동기 부여로 합리화 될 수 있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러한 것들은 본질에서 멀리 벗어나 있다는 것입니다.
성숙한 사랑을 하는 법에 대한 강의를 몇 번 들은 적이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사이일지라도 가치관이 다르고 살아온 배경이 다르기에 충돌은 일어날 수 밖에 없습니다. 충돌을 줄이는 것도 좋으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충돌 이후의 관계를 해결해 나가는 방식입니다. 본질을 기억하라고 말합니다.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것은 본질입니다. 이후, 본질적이지 않은 것을 구분합니다. 가치관이 다른 것, 생각이 다른 것, 성향이 다른 것… 이 모든 것은 관계에 있어서 비본질적입니다. 중요한 문제지만, 나와 다른 우주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을 대할 때에는 관용과 이해를 통해 본질에 좀 더 가까워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람들은 늘 영원하지 않은 것, 비본질적인 것들에 있어 집착하고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본질이 아닌 것들에게는, 온전하다는 기준이 없습니다. 너무나도 상대적인지라, 온전함에 대한 다양한 의견들이 넘쳐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비본질적인 가치에 목을 매게 되면, 그것은 끈질기고 집요한 고통으로 변모하게 됩니다. 모든 사람들은 각자가 생각하는 정답을 일방적으로 서로에게 외치기만 합니다.
그렇다면 본질은 무엇일까요. 저는 우리의 존재 자체라고 생각합니다. 몇 억 분의 확률을 뚫고 태어나, 지구라는 행성 위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는 소중한 인연들이자, 누군가에겐 없어선 안 될 한 명 한 명의 소중한 사람들이니까요. 본질은 늘 우리 가까이에 ‘우리 그 자체’ 로 존재하고 있음에도, 우리는 그 사실을 자주 망각하곤 합니다. 익숙할수록 소중함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말처럼, 본질을 의식하는 과정이 흐려질수록 비본질적인 가치에 더욱 집착하게 되어 버린 것이죠. 이것은 곧 진리를 잃어버린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 사회는 진리를 벗어나 점점 실재하지 않는 이상으로 들어가고만 있습니다. 그 환상이 정말 본질인 것 처럼, 그 환상 속에서 살며 스스로라는 진리 자체를 망각해 버리는 삶을요. 온전함은 우리 스스로도 충분한데 말이에요.
저는 목표의 굴레에서 탈출한 삶이 진정으로 나다운 삶이라 느껴집니다.
우리는 자라오면서 개인의 의사와 상관 없이, 수 없이 많은 목표에 도달하기를 권유받습니다. 그 목표들은 ‘본질에 가까웠는가?’ 라는 질문에 긍정적인 답을 해 줄 수 없습니다. 개인의 진정한 행복과 비전 실현보다는, ’수단’의 느낌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목표는 필요한 것입니다. 의미 있는 성취를 이룰 수 있게 도와주며, 삶의 방향성을 잡아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위를 둘러 보았을 때, 우리가 말하는 목표가 ‘삶의 지향성’ 으로써의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하기는 어렵습니다.
우리 사회의 너무나 많은 비본질적인 것들이 본질적인 것 마냥 행세하며 진짜 본질을 죽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늘 그런 문화에 부딪힐 때 마다 ‘나’라는 본질을 잊지 않기 위해 노력합니다. 이는 분명히 힘들고 확신할 수 없는 길이지만,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어딘가에 샘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비본질적인 것들에 치이며 본질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방황하더라도, 결국 그 모든 과정이 더 단단한, 나라는 본질을 확인할 수 있게 되리라고 믿습니다.
미국의 경영 컨설턴트 스티븐 M. 샤피로 (Stephen M. Shpiro) 는 목표에 집착하는 삶은 출구 없는 고속도로를 달리는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외재적 동기로 가득 차 있었던 지난 날의 목표들을 생각합니다. 몇 달이 걸려 달성한 목표 이후, 끝이 보이지 않는 황무지에 놓여져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음을 기억합니다.
앞서 비본질적인 것이란 상대적인 것이기에 정해져 있는 완벽함의 기준도 없을 뿐더러, 온전함을 찾을 수 없다고 말씀 드렸는데요. 비본질적 목표의 끝은 또 다른 비본질적인 목표였고, 개인의 본질을 벗어나 진정한 나로부터 멀어지는 것과 같기 때문에 목표의 노예가 되어 스스로를 돌볼 수 없게 됩니다. 개인의 가치를 비본질적인 목표 달성으로부터 찾기 때문입니다.
앤코이는 삶은 선물과도 같은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르침 받은 것의 대부분은, 삶을 ‘선물처럼 인식하며 살아내는 것’ 보다는 ‘경쟁하며 올라가는 것’ 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개인의 개성과 비전을 존중하고 개발시키는 것보다는 획일화된 틀 안에서 자라나는 것을 권유하고,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일을 하는 것보다는 사회적 지위가 높으며, 돈을 잘 버는 일을 하는 것이 정답이라 말합니다. 개인의 의지와 상관 없이 생겨난 여러 목표가 족쇄가 되어 삶을 질식시키고 삶의 성장을 멈추게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스스로의 언행에 대해 항상 돌아보며 성찰하고, 남의 잘못에 대해서도 곧바로 용서하고 털어내는 편입니다.
저의 이런 성향이 제 평생의 보물이라고 생각을 하는 편입니다. 앤코이가 삶은 내면을 성장시키는 평생의 학교라는 말씀을 하셨듯이, 삶이란 원하는 것들을 담을 수 있는 그릇 같기도 합니다. 학교를 다니는 기간과 지식 및 경험의 양이 비례하듯이, 반성하고 용서할수록 그릇의 크기가 커져 담을 수 있는 것들이 많아지는 법이니까요.
아직 성숙하지 않은 사람일 뿐이기에 잘못도 하고, 상처도 받고, 화도 냅니다. 그럼에도 더 중요한 건, 그 이후에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인지에 달려 있다는 걸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각자 다른 우주를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부딪힐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부딪히지 않는 법을 고려하는 것 보다는, 어떻게 부딪힐 것인지를 생각하는 것이 더 필요해 보였습니다.
어렸을 적 순하고 무던한 성격 때문에 인간관계에서 이리저리 치이곤 했습니다. 순간적으로 느껴지는 불편한 감정과 분노는 곧 상대에 대한 증오를 낳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일시적인 감정은 사라지고 상대의 행동을 이해해 보려는 제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죠. 화를 오래 가지고 있는 것이 좋지 않다는 건 알지만, 그걸 알고 있기 때문에 행할 수 있는 마음의 전환은 아니었습니다. 저는 생각보다 스스로 화를 부르고는 괴로워하는 사람이었거든요.
쉽게 자존감이 낮아지는 편이라 상대에 대한 시기와 질투도 쉽게 했습니다. 그렇게 살다 보니 대학교에서 계속 신경이 쓰이게 되는 한 친구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좋지 못한 쪽으로 계속 신경을 썼죠. 그 친구에게 좋은 일이 생겼을 때 기분이 딱히 좋지 않았어요. 정말 바닥을 찍었을 땐 마음 속으로 악담을 퍼붓기도 했습니다. 이런 감정을 가지는 게 불편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매일 그 친구의 근황을 확인하며 스스로 기분을 망치려고 애를 썼었죠.
몇 달 정도를 반복했습니다. 그러다가, 기를 쓰고 그 친구를 신경 써왔던 이유를 깨달았습니다.
시작점은 초라한 저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럴싸한 것들로 잘 덮어놓긴 했지만 저는 이것이 열릴 가치가 없는 전시회라는 것을, 스스로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들키고 싶지 않았기에 저를 바꾸는 것 대신 저를 특별하게 만들어 줄 것들을 찾아 다녔고, 그 당시엔 그게 바로 그 친구였습니다. 그 친구는 누가 봐도 참 특별하고 멋진 사람이었어요.
그러다 문득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저 친구도 존재 자체로 정말 소중한 사람인데 내 개인적인 감정과 열등감을 그 친구에게 투사하고 있는 것이 과연 진정한 나일까?’
그 때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한 발짝 물러나서 보니, 전혀 제가 시기하고 질투할 일도, 그런 감정을 가질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누군가의 소중한 사람에게 이런 감정들이 계속 머무르도록 방치한 제 모습이 너무 부끄러워졌습니다. 일방적인 감정에 너무 몰두해 버린 나머지 그 사람의 본질을 바라보려 하지 않았던 것이었죠. 그래서 삶은 그릇과 참 닮은 것 같습니다. 한 순간의 질투와 시기에 사로잡혀 무뎌질 때, 습관처럼 드는 불편한 감정은 내면을 더욱 성숙하게 해 주지 못하거든요. 스스로를 돌아 보고 관철하는 질문을 던졌을 때, 더 많은 것들을 관용하고 이해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며칠 전 상처가 되는 말을 듣고 풀이 죽어 있었는데, 몇 분 후 다시 털어내고 기분이 좋아진 저를 보며 다른 친구가 ‘너 진짜 신기하다. 그거 진짜 엄청 좋은 거야. 난 한 번 그렇게 상처 받으면 최소 하루 정도는 부정적인 감정 쏟는 데에 다 날려. 나도 너처럼 몇 분만에 다 털어내고 싶다.’ 라는 말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 말을 듣고, 반성과 용서에 대한 허들을 낮추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간은 상호적인 관계 속에서 살아나고, 자라납니다. 그렇기에 모두가 서로에게 긍정적이던, 부정적이던 여러 영향을 미치며 살아가고 있죠. 그렇기에 저는 제 태도에 반성과 용서를 녹아냄으로써 사랑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저와 연이 닿는 모든 사람들에게 한 번 더 저 두 가치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주고 싶어요.
엔코이재단을 통해 외재적 동기와 내재적 동기를 구분할 수 있게 되었던 반 년 전이 떠오릅니다.
모든 말이 하나의 진리를 관통하는 것만 같습니다.
저는 여전히 삶을 살아 내는 데에 서툴고, 인간으로서의 명확한 한계에 부딪히곤 하지만.. 그럴 때 마다 저라는 ‘도미노’ 가 어떤 형태로 엎어져 그림을 이루었을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결국 모든 것은 과정이니까요. 흘러가는 과정이니까, 성장하는 과정이니까, 그 자체로도 소중한 것 같단 생각을 많이 합니다. 삶에 대한 제 생각을 많이 바꾸어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어요. 인간으로 태어났기에 주어진 사유의 기회와 본질로의 탐험을 게을리 하지 않고 열심히 이어 나가 보겠습니다.
나비효과라는 말이 있습니다. 나비의 작은 날갯짓이 엄청난 결과를 가지고 올 수도 있다는 말인데, 저는 이 말을 꽤나 좋아하는 편입니다. 모든 것의 시작은 미약하지만 끝은 창대할 것이라는 성경 구절을 개인적으로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회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에, 적은 사람들로부터 시작된 성찰일지언정 시간이 지난 이후에는 더 멀리 닿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앤코이의 의미 있는 행보와 자취를 저는 앞으로도 늘 응원하고 기억하겠습니다. 늘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