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코이에게 전합니다

5기 선발자) 한 발짝 내딛기 두려운 모든 청춘들에게 전합니다.

김** 2024-08-30 16:01 조회수 아이콘 14



 완벽이라는 개념을 사람에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완벽한 상태란 무엇일까요?

 

완벽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완벽한 인간이란 무엇일까요?

인간이라는 명사 앞에 완벽한이라는 형용사가 붙자마자, 굉장히 추상적인 말이 된 걸 느낄 수 있습니다.

 

저는 감히, 질문을 받는 사람들 대부분이 각자 다른 답변을 할 것이라고 예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완벽한 인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DNA는 잘못된 자리에 염기를 가져다 놓을 때가 있고몸속 세포는 아군인 다른 세포를 적으로 생각하고 공격할 때가 있죠.

이처럼 인체 내에서 가장 정교하고 복잡하다고 알려진 DNA나 세포조차도 실수를 합니다.

 

각자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아온 배경이 다르고, 가지게 된 신념과 생각이 전부 다른데 어떻게 인간에 대한 기준이 같을 수 있을까요?

더 나아가, 각자의 기준이 다른데 어떻게 자신의 기준을 타인에게 적용하고, 타인을 평가할 수 있을까요?

 

저는 인간이 완벽과 과감히 거리를 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불완전함이 인간을 더욱 인간답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앞서 말했듯이 인체 내에서는 다양한 실수가 발생합니다.

하지만, 그 실수를 인식하고 바로잡는 시스템 또한 존재합니다.

 

잘못된 자리에 염기를 가져다 놓은 DNA는 실수를 인식하고 수리 시스템을 가동하며아군을 공격한 세포들은 실수를 인식하고 무반응 세포로 변합니다.

이처럼 인간을 구성하는 가장 작은 존재들조차도실수를 인식하고 바로잡으며 인간이 더 나은 방향으로 성장할 수 있게 노력하고 있습니다.

, 창조적인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실수와 실패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실수나 실패를 잣대로스스로를 향상시키려는 우리의 창조적 노력을 비방하는 모든 것들을 두려워할 필요 없습니다.

 

위의 글들은 사실 재작년쯤 비존재의 늪에 깊이 잠식되어 있던 자신에게 스스로 했던 말입니다.

 

초등학생이었을 무렵부터 친척과 함께하는 설과 추석은 절 근원을 알 수 없는 불안감과 기시감에 빠져들게 했습니다.

 친척 중 큰엄마는 유독 자녀 교육에 공을 들이는 분이었습니다. 사촌 동생의 꿈은 옹알이를 할 적부터 이미 의사가 되는 것으로 정해져 있었습니다그런 큰엄마에게 또래보다 공부를 조금 더 잘했던 저는 사촌 동생과 비교하기 좋은 대상이었나 봅니다.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부터 제가 치르는 모든 시험의 결과를 궁금해하셨습니다. 제가 좋은 성적을 받아왔다면 그것을 기준으로 사촌 동생을 몰아세우며 공부하게 만드셨고, 기대에 미치지 않는 성적을 받아올 때면 웃음이 섞인, 무언가 꺼림칙한 위로를 받아야 했습니다.

 

어렸던 저는 큰엄마의 이런 행동에 어떤 의미가 담겼는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냥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성적을 받으면, 칭찬해 주시며 맛있는 갈비찜을 해주시는 큰엄마가 좋았습니다. 그리고, 좋지 못한 성적을 받으면 저를 진심으로 격려해 주시는 것 같은 큰엄마가 좋았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행동들에 어떤 의미가 담겨있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특목고가 아닌 일반고 진학을 결정했던 저는 큰엄마의 속마음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ㅇㅇ이가 특목고를 진학할 건데 니가 먼저 가보고 ㅇㅇ이한테 도움을 줘야지, 대뜸 의대도 못 보내는 일반고를 간다고 하면 어떡하니?”, “하도 주변에서 기대하길래 공부 잘하는 줄 알았는데, 딱히 그런 것도 아니었나 보네.”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오랫동안 좋아하던 사람 앞에서 나 자신이 한없이 작고, 초라해지는 기분을 그때 처음 느꼈던 것 같습니다.


공부를 탁월하게 잘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특목고에 진학한다면 다른 친구들과 저를 비교하며 사기가 꺾일 게 분명했습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많은 고민을 거친 후 결정을 내렸는데, 오로지 큰엄마와 사촌 동생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제 결정이 잘못되었다고 말씀하시는 모습이 너무 슬펐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미웠습니다.

 

저는 큰엄마의 말에 반박하기 위해 3년 동안 필사적으로 노력했습니다.

제 선택이 잘못되지 않았음을, 내가 실패자가 아님을 증명해 보이고 싶었습니다.

 

무의식적으로 일깨워진 내면의 에고는 의 정당성을 남에게 증명하도록 조종했습니다.

에고는 저의 열등감과 불안감을 양분으로 점점 크기를 키워가며 원래 갖고 있던 자아마저 억누를 정도로 비대하게 자라났습니다.

 

내가 진정 원하는 게 무엇인지,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모른 채 진짜 를 잃어버린 채로, 에고에 지배당한 채로 그렇게 살았습니다.

 

제 삶의 목표는 점차 의대를 진학하는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어리석게도 이렇게 노력하고 의대를 진학한다면 큰엄마가 다시 날 좋아해 줄 거라고, 평소처럼 맛있는 갈비찜을 잔뜩 해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비평준화 일반고에서 내신 따기란,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어려웠습니다.

예상보다 낮은 내신을 받은 채로 무리하게 의대 몇 군데를 상향 지원하고, 별생각 없이 생명공학과 몇 군데를 안정 지원했습니다.

 

대한민국의 치열한 입시 판에서 기적이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저는 보기 좋게 모든 의대에 다 떨어졌습니다.

인생에서 처음으로 의 존재에 대해 부정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나의 지능과 재능을 문제 삼으며 자해하기도 하고나의 노력을 의심하며 해가 뜰 때부터 해가 질 때까지 줄곧 울며 하루를 보낸 적도 있습니다내 스스로가 아무런 가치가 없는 사람인 것 같았습니다단지 의대를 진학하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입시가 끝난 설은 제게 정말 최악의 날이었습니다내가 모자라고, 못났고, 부족하고, 실패한 사람이라고 내 입으로 내뱉어야 하는 게 고역이었습니다.

더 참기 힘든 건, 친척들의 반응이었습니다아직도 또렷이 기억납니다. 고개를 들어 마주한 친척들의 표정과 그 눈동자들이, 특히 큰엄마의 묘하게 올라간 입꼬리와 상기된 말투가,

그러게 큰엄마가 특목고 가랬지! 그런 일반고에서 어떻게 의대를 간다고...”,

우리 ㅇㅇ이는 이번에 특목고 친구들이랑 같이 천만원짜리 윈터스쿨 들으러 서울에 가는데.. 맞다 나예는 이런 것도 몰랐겠구나?”

 

머리가 커서 알 수 있었습니다그들이 진정으로 나를 위로하는지, 아니면 은근히 나를 깎아내리며 비웃고 있는 건지.

숨쉬기가 힘들었습니다자꾸만 울음이 터져 나왔습니다친척이란, 피가 섞였다는 것뿐이지 오히려 제겐 남보다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한동안 비존재의 늪에 깊이 잠식되어 있었습니다.

 

부모님의 설득으로 합격했던 대학교 중 한 곳을 진학하긴 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런 의지가 없었기 때문에, 1학기 내내 아무 학과 행사에도 참여하지 않고 공부도 열심히 하지 않았습니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 한 학기가 지나버렸고, 방학이 되었습니다.

SNS 속에서 바라본 대학교 동기들은 전부 밝게 웃으며 고등학생 신분으로는 못했던 경험을 하면서 방학을 즐기는 듯 했습니다.

나만 빼고 다들 행복해 보였습니다.

 

어느 날 목욕을 하다 우연히 제 왼쪽 손목에 검게 남아있는 상처를 들여다보게 되었습니다.

쏟아지는 물줄기를 잊어버린 채, 제가 스스로 낸 상처만 계속 쳐다봤습니다.

그다음 회상했습니다. 이 상처를 내는 줄곧 나의 마음이 어땠었는지갑자기 화가 나기 시작하더니, 눈물이 줄줄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이게 샤워기에서 떨어지는 물인지내 눈에서 흐르는 물인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로 많이 울었습니다.

그러더니 갑자기 억울하고, 분통했습니다.

 

3년 내내 정말 후회 없이 성실하게 살아왔는데누구보다 열심히 노력했고 꾀부리지 않으며 공부했는데그 사실을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는데

스스로 벼랑 끝까지 몰아세우고 질책한 내가 너무 야속했습니다.

 

애초에 의대를 진학하려고 한 것은 저의 의지가 아니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의 기대치를 충족하기 위해 선택한 수단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줄곧 타인의 시선에 내가 어떻게 보일지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진정한 자아가 무엇인지,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알려고 하지 않았습니다타인의 입맛에 맞추어 나를 도려내고, 채찍질한 시간이 너무 아까웠습니다.

 

오랫동안 나를 옥죄어 왔던 에고를 처음으로 마주한 순간이었습니다.

나와 마주한 에고는 힘이 없었습니다.

열등감과 불안감이라는 양분도 없었기 때문에 더 이상 나를 조종할 수도 없었습니다.

 

목욕을 끝내고 나서, 상처에 연고를 바르고 가장 예쁜 밴드를 붙였습니다.

에고를 벗어버리고, 진정한 자아로 도약할 시간이었습니다.

 

전공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부터 시작했습니다.

시험 대비에 급급했던 고교 생명과학과 대학교에서 배울 수 있는 생명과학은 차원이 달랐습니다. 세포의 기능을 자세하게 배우고, 어떠한 기작들이 모여 하나의 체내 대사 과정을 일으킨다는 게 너무 신기했습니다. 날 위해 하는 공부는 너무 즐거웠습니다.

 

그러다 보니 교내 장학생으로 선정되어 학비를 감면받기도 했습니다.

내가 좋아서 하는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더욱 격려해 주는 학교에 감사했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 배우는 실험 과목은 저를 감질나게 했습니다.

실험을 많이 해보고 싶어 자대 연구실에 학부 연구생으로 받아달라는 메일을 보내곤 했습니다.

하지만 저학년인 저를 받아주는 연구실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외부로 시선을 돌렸습니다여러 연구 기관을 고민하다가 종합병원의 병리실이라면 H&E 염색 과정을 자세히 배울 수 있고, 수술 후 검출된 여러 조직들을 관찰할 수 있을 것 같아 연락을 드렸습니다.

병리실에서 봉사활동을 하면서 원하는 공부를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긍정적인 답변을 받았고, 현재까지 매주 꾸준히 봉사활동을 해오고 있습니다최근에는 북한 의료에도 관심이 생겨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서 주최하는 아카데미에 지원하여 합격했고, ‘급 국가 보안시설인 하나원을 견학하여 북한이탈주민과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습니다.

 

진정한 자아를 찾아 도약하다 생긴 가장 큰 변화는타인의 기준에 맞추어 성공과 실패를 구분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저만의 기준을 세우려고 노력하지만그것을 타인에게 바라거나 그것을 잣대로 타인을 평가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를 더 나은 나로 성장시키기 위한 모든 창조적인 노력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단단해진 채로 맞이한 설은 예전만큼 두렵지 않았습니다.

불안감과 열등감 대신 나에 대한 확신으로 꽉 차 있었기 때문에나를 괴롭히는 모든 말에 얼마든지 차분하고 당당하게 진정한 나의 목소리를 표현할 자신이 있었습니다.

 

이상하게도 큰엄마는 아무 말씀이 없었습니다.

원래라면 대학 생활에 대해 잔뜩 질문을 쏟아내셔야 하는데조용히 차례 음식을 준비하시기만 했습니다.

큰엄마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친척들이 수군대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특목고라고 자랑하고, 사교육에 돈을 쏟아붓더니만 대학교를 다 떨어졌대.”

벌써 재수학원 알아본다고 난리더라고, 쟤는 쪽팔려서 그런가 방에서 나오지도 않네

 

이젠 사촌 동생의 대입 결과가 그들의 먹잇감이 되었습니다.

제가 느꼈던 감정은 통쾌함이나 후련함이 아니었습니다.

정확히는 진절머리가 났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다른 사람의 아픔을 보고 기뻐하는, 에고에 지배당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아픔을 줬던 사람이라고 해서 그들이 불행하길 바라거나 슬퍼하길 바라지 않았습니다.

이런 식으로 아픔을 겪는 사람은 내가 끝이어야 했습니다.

사촌 동생까지는 이런 소리를 듣지 않았으면 했습니다.

인생에서 처음으로 용기를 내어 친척들 앞에서 큰 소리를 냈습니다.

친척이라는 사람들이 고작 19살 된 아이의 입시 결과로 씹고 뜯고 깔깔거리며 재미를 느끼는데이게 정녕 같은 피가 섞인 가족이 맞는지 물었습니다.

식구들이 오순도순 모여 단란한 시간을 보내는 게 설인데, 왜 이렇게 다들 누군가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지 물었습니다.

다들 조용했습니다.

부모님도 동조했습니다.

어른이 되어서 모범이 되진 못할망정 아이들을 헐뜯는 게 정상이냐고 물었습니다.

 

다들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대답이 없는 이유는 아마 그들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멀리서 절 바라보는 큰엄마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습니다.

 

집에 갈 채비를 하는데 갑자기 큰엄마가 오셔서 저를 세게 안아주셨습니다.

고맙고 정말 많이 미안하다고 하셨습니다.

이유를 장황하게 말씀하지는 않으셨지만얼마나 미안해하고 계시는지 목소리의 떨림과 심박수로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괜찮다고 답했습니다.

그리곤 제 진심을 담아서 한 번 더 큰 엄마를 세게 안아드렸습니다.

전 저를 아프게 했던 사람을 용서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어릴 때는 알지 못했지만, 성인이 된 지금 생각해 보면

꽤 오래전부터 부모님은 차별과 권리에 관심이 많은 분이었던 것 같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이었을 때, 매달 한 번씩 자리를 바꾸곤 했습니다.

기대에 부푼 채로 누구와 짝이 될지 기다리는 게 즐거웠습니다.

신기하게도 일년내내 제 짝은 똑같은 아이였습니다.

저는 수많은 확률을 뚫고 항상 짝이 되는 그 친구와 제가 운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친구는 그림을 잘 그리고, 종이접기를 잘하고, 글씨가 참 예쁜 아이였습니다.

여러 겹의 쌍꺼풀이 있어 웃을 때 예쁜 호선을 띠는 아이였습니다.

저는 짝꿍이 집에서 그려오는 만화를 보는 걸 좋아했습니다.

수업 시간에는 종종 판서하는 선생님 몰래 둘이 필담으로 쪽지를 주고받으며

만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거나, 다음 화 소재를 구상하기도 했습니다.

미술 시간에는 그림을 그리는 것보단 짝꿍 그림을 구경하는 걸 좋아했습니다.

몇 분 만에 연필로 뚝딱 스케치를 해내고, 적절한 곳에 적절한 색을 사용하여 멋진 그림을 그려내는 짝꿍이 신기했습니다.

 전 미대 CC였던 부모님을 두고 있지만 예술적 재능이 단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그 아이의 세계는 제겐 너무 대단해 보였습니다.

 

5학년 때 다른 반이 되어버려서 눈물 콧물을 흘리던 제게

짝꿍은 자기가 그린 만화책 한 권을 선물해 줬습니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다른 지역으로 이사 가게 되어서 짐을 정리하다가

그 만화책을 다시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추억을 떠올리며, 짝꿍과 함께했던 재밌는 일들을 부모님께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엄마에게 조금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사실 제 짝꿍은 어렸을 적 백혈병을 앓았습니다.

다행히 건강을 되찾아서 4학년 때부터 정상적으로 초등학교에 다닐 수 있게 되었는데,

이 사실까지는 담임 선생님께서 설명해 주셔서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후유증으로 인해 보청기를 끼고 다니고, 피부 표면이 갈라져 있고 까맣다는 이유로

다른 학생들의 부모님들이 담임 선생님께 찝찝하니까 우리 애 옆자리에는 앉지 않게 해주세요.”라고 부탁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엄마는 학부모 상담을 하다가 그 사실을 알게 되었고,

담임 선생님께 우리 딸과 계속 짝을 하게 해달라고 했다고 제게 말했습니다.

 너무 충격이었습니다. 백혈병은 옮는 병이 아닌데도, 또래의 자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린아이에게 상처가 되는 말을 함부로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사실이 너무 가혹했습니다.

 

엄마는 제가 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아이로 성장하지 않길 바랐고,

그 아이가 상처받거나, 차별받지 않기를 바랐다고 했습니다.

엄마는 제 앞에서 짝꿍의 겉모습에 대해 일체 언급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고 했습니다.

대신 짝꿍이 백혈병을 이겨냈다는 사실이 대단하다고 말해주고,

짝꿍의 장점이 무엇이고 어떤 것을 잘하는지 물어보려고 노력했다고 했습니다.

짝꿍은 백혈병 때문에 겉모습이 우리랑 조금 다른 거야. 차별하지 않아야 해.”가 아니라,

겉모습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그 사람이 가진 장점에 집중함으로써

저와 짝꿍이 조금도 다르지 않은 사람이며, 짝꿍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는 걸

무의식중에 학습하도록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엄마가 가르쳐준 존중에는 깊은 마음이 담겨있었습니다.

존중하다 보니 주변 사람들의 장점을 쉽게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장점을 얘기함으로써, 그들이 가진 아픔이나 슬픔에 손을 내밀 수 있었습니다..

 

최근 제가 일평생을 바쳐 이루고 싶은 목표가 생겼습니다. 세포치료제로 치료가 가능한 질환의 범위를 확대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수술 불가능한 희귀 난치성 질환의 세포치료제를 생산함으로써 세상에 기여하고 싶습니다. 여기서 그치는 게 아니라, 제 연구를 계기로 미래에 더 많은 연구자가 세포치료제의 가능성에 주목하고, 후속 연구를 진행하며 다양한 치료제를 개발하고 싶습니다.

 

급하게 응급실로 배치를 받아 봉사활동을 했을 때 희귀 난치성 질환 환자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마땅한 치료제가 없어, 고용량의 스테로이드를 투여해 면역 체계를 바꾸는 식으로 증세 악화를 막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말투에서 묻어나는 씁쓸함과 애석함이 슬펐습니다.

소수의 질환이라고 눈길을 주지 않는 희귀 난치성 질환을 치료해야겠다고 다짐은, 제겐 생명과학 연구를 일평생 지속할 동기가 되었습니다.

줄기세포가 분비하는 2차 물질을 추출하여, 면역 거부 반응과 종양 발생의 위험이 없는 치료제를 개발하고 싶습니다.

 




 


앤코이가 말합니다’ 페이지의 글들을 오랜 시간 읽으며 따뜻하고 농후한 메시지를 전달받았습니다.

모든 글에서 청춘을 향한 따스한 지지너그러운 이해부드러운 가르침이 느껴졌습니다.

앤코이의 글만큼은 아니더라도영상을 시청하는 사람들에게 따스한 지지를 보내고 싶었습니다.

 

홀로 걸어갈 때주변에서 나를 지지해 주는 사람이 한 명만 있어도 큰 힘이 된다는 점을 떠올리며 이 영상을 제작했습니다.

 

인생에서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정말 많이 직면한 사람으로서,

나와 같은 상황을 겪고 있는 청춘들을 위해 위로와 격려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습니다.

내일의 더 나은 나가 되기 위해 묵묵히 걸어가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친구로서동료로서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고 싶었습니다.

 

걱정하고두려움을 느낀다고 해서 스스로 자책할 필요가 없으며,

오히려 그런 감정을 느끼는 게 자연스러운 거라고 말해주고 싶었습니다.

또한자신의 감정에 솔직할수록 나에 대한 확신이 커질 수 있다는 것도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저는 저만 볼 수 있는 글을 쓸 때조차 솔직하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가정사를 꺼내거나, 생각 회로를 마음껏 펼쳤던 적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래서 처음 신청서를 쓸 때는 글이 어색하고, 난잡했습니다.

단순히 도움을 얻고자 읽었던 앤코이의 글들은 제 심연에 깊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누군가의 정교한 글은, 타인의 심연에 울림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생에서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그 울림이 얼마나 깊고, 길었는지 모릅니다. 저도 모르는 사이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습니다.

에고라는 개념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과거 내가 에고에 지배당했다는 것을 처음 인지했습니다.

앤코이의 울림에 힘을 얻었던 것인지, 저는 날 것의 감정을 차곡차곡 신청서에 담기 시작했습니다. 너무 날 것의 감정을 담으려고 하니 주춤거리긴 했지만, 나의 심연을 견딘 솔직한 문장들이 제 눈엔 가장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감정과 똑바로 마주하여 출력한 문장들에는 의식을 성장시킬 힘이 있었습니다.

심연의 나와 마주하게 도와준 앤코이에게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글을 쓰는 내내 나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어 행복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위 영상은 2026년 10월까지 게시될 예정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