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 내면의 꽃이 피어나는 터전을 마련하세요.
앤코이 교육재단 2021-04-29 18:10 3097
내면의 꽃이 피어나는 터전을 마련하세요.
행복은 무한한 양으로 존재합니다.
행복은 경쟁이 필요 없습니다.
그러므로 타인이 행복하면 다정한 마음으로 같이 행복해 하세요.
행복한 사람과 다정하게 지내면 즉각 상대의 행복이 나에게 전해집니다.
행복은 행복한 이의 나눔에 있는 게 아니라, 내가 함께 나누는데 있습니다.
지혜나 행복, 조율, 평화, 직관력이 자신보다 나은 사람을 찾으세요.
타인의 행복과 함께 하는 것이 자신의 행복을 위한 토대입니다.
토대가 마련되면 행복은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자비는 상대를 진정으로 돕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자비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불쌍한 사람을 돕고 싶지만 상대와 같이 불행해 하고 그와 같은 위치로 내려가지는 않습니다.
같이 불행해 하는 건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지요.
상대의 고통에 슬퍼한다면 '나도 그게 나쁘다고 생각해' 라고 상대의 부정적 신념을 재확인 시켜주는 것이 됩니다.
연민은 우애의 한 표현일 순 있어도 자비는 아닙니다.
자비심의 관심은 상대의 불행을 지향하지 않고 상대라는 '존재'로 향합니다.
자비심은 상대가 불행에서 빠져나오기를 바라는 마음을 뜻합니다.
그는 상대를 불행에서 빠져나오게 할 뿐, 같이 불행 속으로 들어가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자비심이란 대상에 초연하는 마음입니다.
손을 내밀되 초연하십시오.
이때 우리에게 보다 필요한 것은 인류의 존엄과 가치를 경건하게 자각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불행을 쫒기 쉽습니다.
타인이 불행해 하면 연민을 느낄 수도 있지만 행복해 하면 질투를 느끼기 쉽기 때문입니다.
덕 있고 행복한 사람을 보면 그를 비난하고 흠을 잡아내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자신 안에 없음을 보고, 자신의 에고가 상처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변화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은 알지만, 상대를 비난하는 것은 차라리 쉽고 간단하니까요.
비난하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누군가 덕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일은 대단히 어렵습니다.
노아 엘크리프는 자신의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누군가에게 화가 나거나 판단하려는 것이 실제로는 자기 자신에 관한 부정적인 생각이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주의를 돌리기 위한 것일 때가 많음을 인정할 수 있다면 그는 성숙한 사람이다.
우리는 비교를 통해서 상대를 나보다 나쁘다고 여김으로써, 자신이 어떤 면에서는 더 낫다고 믿고 싶어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부정을 쉽게 믿어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no를 반박하기란 대단히 어렵기 때문입니다.
상대 의견을 부정하기란 매우 쉽고, 부정은 쉽게 믿어지며, 긍정은 쉽사리 믿지 못합니다.
그것이 자기 에고에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덕 있는 사람을 부정하는 것은 결국 덕 있는 사람을 해치는 것이 아니라, 부정하는 사람 자신을 해치고, 그 자신에게 독을 주입하는, 서서히 자살하는 행위입니다.
좋다 나쁘다는 대상의 특성이 아닙니다. 그저 대상에 대한 접근법일 뿐입니다.
선과 악을 판단하는 것에 무심하십시오. 그저 어둠을 무시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무시와 무심, 이 둘의 차이는 상당히 미묘하지만 엄연히 다릅니다.
무심은 반감이나 도피가 아닙니다.
대상에서 눈길을 돌리라는 말씀도 아닙니다.
눈길을 돌리고 설령 눈을 감는다 해도 생각이나 태도가 그대로라면요?
여기에서 말씀 드리는 무심은 '그것이 좋다 나쁘다 판단하고 심판하는 너는 과연 누구인가?'라고 묻는 것입니다.
'참 나는 누구인가, 내가 어떻게 이것은 악이요, 저것은 선이다 라고 말할 수 있는가? 과연 누가 아는가?'
손가락질을 외부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주의력을 바로 내면 중심으로 이동시키시라는 의미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전체의식과 연관된 '순수의식' 안에서, 그것이 그저 상대의 '자유의지의 발현'임을 제대로 볼 수만 있다면, 그 어떤 골치 아픈 관계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동안 스스로를 피해의식에 옭아매게 했던 모든 평가,
즉 무엇은 반드시 해야하고, 또는 어떤 일은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된다라는 평가라는 '덫'으로부터 일단 해방될 '기회'가 됩니다.
물론 쉽지 않습니다. 많은 훈련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접하는 대다수 사람들은 집단의식을 비롯한 자신들의 심리에 묶임으로써 스스로 피해자와 가해자를 반복합니다.
집단의식은 국지적이고 이분법적인 사고에 의해 아주 많은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위력에 의존하게 하고, 이 의존은 사람들을 아래로 끌어내립니다.
여러분들께 권고드리고 싶은 바는, 위력에의 의존과 이원성의 한계에서 벗어나, 위로 향하는 영향력, 인간의 참된 본성의 무한한 힘에 다시 정렬하는 것입니다.
영적 존재로서의 연결감을 되찾는 것은 매우 중요한데, 이것으로 인간은 보이는 것 너머의 더 높은 참조틀을 가지게 됩니다
행복한 사람과 행복해 하고, 불행한 사람에게 자비심을 내고, 덕 있는 사람과 함께 기뻐하고, 영적 존재로서의 연결감을 되찾아, 진정한 정체성에 기반한 분별력을 계속 길러 나가십시오.
그러면 정녕 우리는 자신의 꽃이 피어나는 터전을 마련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행복하기에 충분치 않다는 믿음은, 우리 삶의 어떤 면을 자신이 생각하는 행복의 조건과 비교함으로써 만들어집니다.
어쩌면... 우리의 상황은 정말로 나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고통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보다는 나쁠 것이라 판단하는 미래로의 투사들에 의해 배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