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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I) 생존(경쟁)에서 공존(협력)으로

앤코이 교육재단 2022-07-30 08:36 조회수 아이콘 601

생존을 보장하는 것은 사실 경쟁이 아니라 '협력과 적응'입니다.






이제 벌써 5년도 넘었습니다만, 방탄소년단이 발매한  중에 ‘뱁새라는 곡이 있지요.

다들 아시다시피, ‘뱁새가 황새 쫒으려다 다리 찢어진다.’ 속담에서 비롯한 뱁새를 뜻합니다.



출처: 구글 이미지


BST는 개인의 노력보다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환경과 부에 따라 금수저와 흙수저로 인간의 계급이 나뉜다는 양극화를 두고 화두를 던졌는데요.


노력노력 타령  그만 ’ 라고 문제를 지적합니다.

실제로 삼포세대 담론이 대두되었을  청년들이 ‘열심히 살지 않아서 그렇다.’ ‘요새 애들은 고생을 모른다.’ ‘노력이 부족하다.’ 비난이 존재했습니다.

하지만 흔히 486세대로 일컫어지는 기성세대가 취업했을 때 당시처럼 대학만 나와도 취업이 되던 세상은 이미 지나갔고, 이미 안정적인 직업을 경험했던 기성세대를 제외한 미생들의 경쟁은 특히 심화되고 있죠.


청년실업의 급증과 채용 비리 문제, 열정페이, 수저 계급론 등의 사회이슈는 한국의 사회 구조가 노력해도 성공할 수 없는 불평등한 구조라는, 그리고 노력을 인정받지 못한다는 인식으로 점점 확산되고 있으며, 이러한 상황에서 경쟁을 포기한 탈락자들을 책망하기도 어렵습니다.



이 자리에서 당장 그 해결을 논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한 가지, 함께 이야기 해보았으면 하는 것이 있는데, 바로 적자생존에 대한 관념입니다.


동물의 왕국과 같은 TV프로그램을 보면, 사자나 표범 등의 동물들이 거침없이 자신보다 약하고 죄없는 동물들을 사납고 포악하게 잡아먹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바로 '약육강식', 그리고 '적자생존'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보며 익숙하게 부여하고 있었던 관념과는 달리, 이 맹수로 보이는 동물들은 사실, 상호적 순환이라는 생태계 안에서 오묘하게 균형을 맞추고 있었을 뿐입니다.

즉, 인간의 방식처럼 욕심으로 맹목적이 된다거나, 수단을 뒤바꾼 사냥을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죠. 



출처: 구글이미지



적자생존에 대한 인간이 부여한 관념들은, 마치 자연자체가 소수의 지배엘리트의 존재를 만들고 지지하는 것처럼 보이게도 합니다.

이를 통해 '사람들을 통치할 운명을 타고난 우월한 존재가 있다'는 의식이 우리 안에 교묘히 침투해 들어와 있습니다.


자, 인간은 자기인식을 합니다. 그렇죠?

그것의 한 측면은 인간은 고통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살아 있고, 의식하며, 자신의 외부조건을 알고 있으며, 이러한 외부조건에 대한 반응들을 서로 알고 있습니다.

인간이 다른 이들에게 해서는 안되는 어떠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내면의 감각입니다.

자신에게 고통스럽다면 다른 이에게도 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그저 '치열한 경쟁'과 '적자생존'이라고 말하는 것에 근거한 진화 과정의 산물이라고만 믿는다면 다른 인간에게 해서는 안되는 어떠한 일이 있다는 것을 인식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생존을 위해 적합한 것은 무엇이든 다 할테지요.


앞 게시글에서 우리는 '의식에는 창조력이 있다'고 언급했습니다.

흙수저와 금수저... 태생적으로 극복할 수 없는 계급, 그리고 이것이 어쩔 수 없고 당연하다는 한계감...

안타깝지만 그 지속적인 한계감이 오히려 그러한 상황을 더욱 공고하게 만드는데 에너지를 더하고 있다는 것을

그대는 혹시 볼 수 있나요?


사실상 생존의 열쇠는 다윈이 주장한대로 가장 강하고, 가장 공격적이라는 의미에서 적자생존(the survival of the fittest)이 아닙니다. 

공룡들이 지구에서 사라졌던 것이 기후조건의 변화에 적응할 수 없었기 때문이듯 말입니다.

생존의 핵심은 적응력(adaptability)이고, 그러므로 적자(the fittest)는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이들입니다.


여러분은 과학자들이 지질학적 시대에 대해 발견한 것을 관찰함으로써 지구상의 상황이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흐름의 끊임없는 상태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한다면, 무한정 똑같은 인위적인 체계를 유지하는 것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 수 있습니다.

적어도, 어떤 궁극적인 시스템을 만드는 것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인류는 아직 태어나고 있는 중인 하나의 유기적인 통일체입니다.

여기에도 똑같이 자연의 기본적인 설계가 작동하고 있습니다.


열역학 제2법칙에 대해 들어 보셨는지요.

세상에는 스스로 바로 잡을 (self correcting)수 있는 일련의 법칙이 존재하는데, 이 법칙 중 하나가 바로 열역학 제2법칙, 즉 폐쇄된 시스템은 붕괴한다는 것입니다.


우주 안에서 진화의 과정은 에너지의 흐름을 통해 일어나지만 이 자연스러움을 역행해서 폐쇄시스템을 만들어 버리면, 다시 말해 에너지가 유입되지 않는다면 아인슈타인이 밝힌 것처럼 물질은 단지 또 다른 형태의 에너지에 불과한 것이므로 모든 것이 점점 더 혼란스러워지고 더 무질서해지는 것입니다.


전체 중 일부분을 격상시키면 균형을 위하여 반대극이 발생하고 상호 소멸을 통해 원상태로 돌아가는 현상이 발생합니다.


폐쇄적인 시스템을 만들고 나면, 그것은 시간의 차이일 뿐, 파멸이 이미 내장되어 있죠.

공산주의 몰락이 그것을 대표적으로 보여주고 있구요.


혹시 아이작 아시모프(Isaac Asimov)의 소설 <최후의 질문>을 읽어보신 분 계신가요?  

거기 보면 과학자들이 어떻게 하면 컴퓨터를 통해 우주 전체의 엔트로피 총량이 대량으로 감소될 수 있을까 하고 고민하는 부분이 나옵니다.


사실 우리가 알고 있다시피, 영구히 움직이는 기계는 결코 만들 수 없고, 우리는 항상 사용한 것보다 적은 에너지를 얻습니다.


이에 반면 우주 에너지장의 경우는 이와 다릅니다.

추후 더 언급드릴 기회가 있겠지만 앤코이는 이에 대한 보다 더 나은 대안을, 우주 에너지장이 더 많은 에너지를 계속해서 창조해낸다는 것에 접근하는 것이리라 봅니다.

그것은 아무리 사용해도 항상 충만되어 있죠.


이번에도 이야기가 잠깐 샌 듯한데 ^^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왜 인간이 지구상에서 볼 수 있는 거의 모든 종류의 환경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 왜 인간이라는 종이 지구를 점령하게 되었는지 묻는다면 그것은 바로 인간이 가진 '의식적으로 바꿀 수 있는 능력'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생존을 보장하는 것은 사실 경쟁이 아니라 '협력과 적응'입니다.


민주사회의 기본은 누구나 최고의 잠재력으로 성장할 기회를 보장 받는 것, 자신의 가치를 그대로 존중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민주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고, 스스로 민주주의 이념과 원리를 지지하고 있다고 믿고 있지만 무의식에서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충돌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 인지부조화가 혹시 보이시나요?

이것이 계속 유지되기를 원하는 것은 과연 어느 쪽일까요?


기나긴 지구의 역사 속에서, 어떤 관념들을 통해서 그 위치와 권력을 지탱해온 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은 거 같습니다.

역으로, 그 관념의 지탱 없이는 그 지위를 계속 유지할 수 없다는 것도요.

독재자조차도 피 지배계급의 동의 없이는 계속 그 자리에 있지 못한답니다.


만약 임계수치 이상의 사람들이 그것을 똑바로 인식할 수 있다면, 역사상 그들이 사용해왔던 관념들을 면밀히 검토함으로써, 어쩌면 이 글을 읽는 누군가는 그들의 필요성을 받아들이게 하는 이데올로기, 사상체계들을 꿰뚫어보게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것으로 계속되는 변화 안에서 우리 다음 세대들은, 노력에 '노오력'을 거듭해도 인정받은 적이 없다는 인식이나 '타고나지 못했기에 성공할 수 없다'에 대한 상처와 경험보다는 다른 시각, 다른 견해로 물꼬를 틀 수 있기를 한번 소망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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