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 가정폭력피해가정에 앤코이가 사랑을 담아 드리고픈 메시지 ♡
앤코이 교육재단 2021-07-24 18:02 962
사랑하는 그대에게 바칩니다.
가정폭력피해가정 자녀분들에게는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부모로부터
충분히 사랑 받고 지지 받고 싶었으나 좌절되었던 내면 아이’의 깊은 상처입니다.
많은 가족들이 가정 내에서 갈등을 겪습니다.
과연 우리는 어떻게 가족들로부터 결핍과 상처에 대한 영향을
받지 않고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부모의 잘못을 내 자식에게 되풀이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심리치료사 클라우디아 하르만은 그 유일한 해결책이 부모를 각각
한 명의 인간으로서 이해하는데 있다고 말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 또한 독립적이고 온전한 인간으로 마음껏
성장해나간다고.
동양권 문화에서 ‘효도’라는
가르침이 주는 오류
많은 부모님들이 자녀들을 독립적인 인격체로 인식하지 못하고 자신의 분신이라 생각한 나머지, 종종 자식의 욕구를 외면하고 경계를 침범해, 자식을 지배하고 통제하려 들곤 합니다.
부모와 아이 사이의 관계에서, 부모가 아이를 돌보는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라, 반대로 부모 스스로 아이에게 의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이에게 주는 사랑마저 그 뿌리가 아이의 욕망이 아니라 자기
욕망, 즉 자신이 더 중요한 것이죠.
앤코이는 지금 가정폭력피해가정의 부모님들을 비난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완벽한 부모란 없으며, 스스로
원해서 나쁜 부모가 된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부모 입장에서, 혹은 가정폭력피해를 입힌 가해자인 남편의 입장에서, 그들 또한 한 때 폭력피해가정의 자녀이거나 충족되지 못한 애착의 결핍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들의 부모인 조부모 세대 또한 감히 들여다볼 엄두도 내지
못할 정도로 커다란 고통을 가슴에 담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만약 전쟁을 겪은 세대라면 전쟁의 광기가 인간의 감정을 비정상으로
몰고 간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즉, 상처를
주는 어른은 어제 상처를 입은 아이이며, 폭력과 전쟁은 한 세대에서 끝나는 악몽이 아닙니다.
사실 어린 아이들은 그것이 설령 폭력이라 할지라도, 부모의 요구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는데, 이 과정을 내적투사라고 부릅니다.
내적투사란, 다른
사람의 태도나 가치, 혹은 행동을 마치 자신의 것인 것처럼 동일시하는 과정입니다.
어린 시절 아무런 의문 없이 받아들인 부모와 사회의 요구들은
성인이 되어서 극심한 혼란과 정서불안, 질병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동양권 문화에서는 ‘자식이
부모에게 꼭 효도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오류는 효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 자녀가 부모에게 느끼는 미움이나 분노와 같은 감정들을 제대로 표출하지 못하고 억제하며 성장하게 된다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마음 깊은 곳에서 부모를 미워하는 것에 대한 죄책감과 수치심을 주는데, 부모를 사랑한다는 감정에 가려 스스로 이를 알아채기란 쉽지 않습니다.
이것의 바탕에는 사실 ‘부모를
존경하지 않는 불효자식’이라는 사회적 낙인이 두려운 공포가 깔려 있습니다.
무언가를 부정하고 거부하고 비난하거나 억제하면 그 부분들은
어둠 속으로 들어가 무의식이 됩니다.
그리고 무의식은 바로 죄책감, 수치심, 억압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내면의 분열을 초래합니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면 마음은 하나입니다.
하나가 될 때 그대는 건강하지만, 내면의 분리, 즉 분열은 건강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부정과 억압은 생존을 위해 인류가 선택하는 매우 흔한 반응이고, 겉에서 보기엔 별 문제가 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트라우마 치료자들은 그런 억압으로 오랜 시간 아무렇지 않게 잘 버티던 사람들도 한참 후에 갑자기 호흡, 혈액순환, 소화와 같은 몸의 여러 기능들에 이상 증상을 보이는 경우를 많이 보아왔다고 일관되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경우의 예는 앨리스
밀러의 책 <폭력의 기억, 사랑을
잃어버린 사람들>에 담겨 있듯, 도스토예프스키, 니체, 프리드리히 쉴러, 버지니아 울프, 미시마 유키오, 마르셀 프루스트, 제임스 조이스 등 많은 사람에게서
또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만약 충분한 지지를 받아 자신의 고통과 연결되어 그 감정들을 허락한다면 다시 완전해질 수 있음에도, 사건과 그 결과를 하찮게 여기고 계속해서 그 감정들을 회피한다면, 이것은 트라우마가 되어 평생, 아니 세대를 거쳐 지속되는 불균형을 만들어 냅니다.
실상 트라우마의 원인이 ‘그 사건’ 자체라기보다, 그것을 머릿 속에서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른 우리 신경시스템의 과부하이기 때문이죠.
자신이 어린시절 자신이 겪었던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부모를 이상화 하느라 사태의
본질을 회피한다면,
(아이 입장에서는 그렇게 선택하게 될 가능성이 훨씬 높습니다.)
아이는 경험된 감정과 도덕적 지시 사이에서 혼동하며 결국
분열되게 됩니다.
몸은 오성과 달리 도덕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미지 출처: 한국일보 기사
폭력의 상황에서 대처하는 방법
자신이 꼭 지키고 싶은 영역을 지속적으로 침범 받고 있다면, 명확하고 단호하게 의사를 전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상대의 방식을 강요받음으로 해서 자신이 어떤 느낌이 들었는지 건설적으로 대화하는 방법과 지혜를 찾고, 반응 패턴에 끌려가거나 반항하는 방식 대신, 진심을 담아 말해보세요.
삶을 어떻게 보는지, 자신의 이해력이 어떤 것인지, 자신이 행복으로 나아가기 위해 존중 받길 원하는 방식 등을 말입니다.
그러나, 가해자는 단순히 변하지 않거나 잘못을 인정하려 하지 않고, 변한다 해도 아주 천천히 변화하기 때문에, 많은 경우 구원해주고 싶어 충분히 애를 써봤던 배우자에게, 그리고 자녀들에게 이미 많은 실망과 고통을 안겨다 주었습니다.
다음은 폭력의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지 하나의 대안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공포에 빠지지 않도록 하세요.
즉, 폭력의 상황에서 본인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것부터 시작하십시오.
결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상황에 있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일어날 일보다 더 나은 해결의 길을 열기 위해, 항상 그대가 할 수 있는 일이 존재합니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첫 번째입니다.
일단 외부의 도움을 받기 위해 가능한 모든 조취를 취합니다.
먼저 물리적 도움을 청한 뒤에, 만약 신앙을 가지고 계신 분이라면 가슴 중심에서 영적인 도움을 요청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는 지금 즉시 이 모든 상황을 지휘해주실 것을 요청합니다.
이 상황에 연관된 저와 oo의 수호천사와 상위자아에 요청합니다.
우리의 행동과 신의 승리의 결과를 깨우쳐 주시고,
제게 이 상황을 보는 더 나은 방법과 이해가 무엇인지 가르쳐 주소서."
(속으로 말해도 됩니다. 각자의 신앙에 따라, 파란 색으로 표시된 부분을 다른 대상으로 바꾸어 기도하실 수 있습니다.
성모마리아, 붓다, 알라... 자신이 넣고 싶은 다른 대상을 넣으셔도 됩니다.
oo 부분에는 상황에 연관된 사람들의 이름을 넣으세요.
그리고 나서 잠시 몇 분간 자신이 조건없는 무한한 사랑 안에 둘러싸여 있음을 느껴봅니다. )
해야 할 바를 서로 다했다면, 그리고 상대로부터 폭력이나 죄책감을 동원한 어떤 지나친 요구나 필요 이상의 간섭 혹은 양육에 대한 무책임 등이 지속적으로 느껴진다면, 관계의 경계선을 그어야 할 때입니다.
그것이 만약 폭력의 경우라면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은 스스로의 안전을 지키고, 좌절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고, 좌절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가해자를 바꿀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대는 또한 가해자를 수용하기 위해 자신을 바꿀 필요가 없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대는 진정한 자신(Who you are)으로 있으면서 자신의 여정을 따를 권리가 있습니다.
그것이 그대가 그를 넘어서 더 나은 삶으로 이동하는 것을 의미한다면 그대는 그를 뒤에 남겨 놓고 떠날 권리를 갖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대 스스로 지체하는 것이 그를 돕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대 스스로 지체하는 것은 분명히 그대 자신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자신에 대해 조건 없이 사랑스러운 태도를 지니십시오.
그럼으로써 상황에 감정적으로 반응하는 대신, 상황을 좀 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내면의 힘을 축적하세요.
내면의 힘, 치유
가정폭력 피해가정의 경우 부모 간에 애착관계가 평탄하지 않은 경우가 많고, 이 초기 결함은 서로 간에 건강하지 못한 의존과 자녀의 남은 인생 전체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부모를 통해 타인과 관계 맺는 법을 배우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가정폭력 피해가정 구성원들은 앞으로 인간관계에서 영원히 문제를 겪어야 할까요?
다행히 두뇌에서 일어나는 신경 생물학적 과정과 인간의 상호작용을 연구하는 단연 선도적인 인물인 앨랜 쇼어는 우리에게 좋은 소식을 전해 줍니다.
“당신의 의식을 바꾸세요, 그럼 두뇌도 바뀝니다.”
즉, 사는 동안 애착 및 관계를 결정하는 뇌와 신경시스템을 바꿀 수 있다는 뜻입니다.
내면 작업 모델이 좋은 것은 이것이 나이와 관계없이 수정이 가능하다는 것이죠. 즉, 치유가 가능합니다.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내면아이요법, 상담요법, EMDR(안구 운동 민감 소실 및 재처리 요법), 최면요법, 게쉬탈트 요법 등 많은 기법들이 존재합니다.
EMDR의 경우 부정적인 기억을 떠올리면서 눈동자를 좌우로 움직이는 것이 전부입니다.
실제 그것만으로 해당 기억에 대해 뇌가 처리하는 패턴이 재조정 되면서 기억으로 인해 불편해진 감정이 사라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 생로병사의 비밀-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치료법 [EMDR] Kelly님의 블로그에서 퍼옴
‘감정 라벨링’ 역시 혼자 할 수 있으면서도 균형을 잡는데 있어 유용하고 필요한 기술입니다.
감정 라벨링이란,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인식하고, 이 감정은 이런 감정이라고 이름을 붙여주는 것입니다.
‘지금 올라오는 감정은 불안, 슬픔이야’, ‘지금 수치심과 분노가 느껴져’라는 식으로 말이죠.
사회신경과학의 권위자 매튜 리버만은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작업이 불필요한 감정 소모를 멈추고, 평정심을 찾는 데 도움을 준다고 말합니다.
뇌의 기능 중 브레이크 역할을 하는 부위를 활성화시키기 때문이지요.
치유와 완전한 자유로 나아가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것이 있는데, 바로 용서입니다.
용서란 상대방을 갈고리에서 빠져나오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라, 자신이 그것에서 빠져나오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써니즈, <치유> 루이스 L.헤이)
안경을 벗을 용기만 있으면
신경생물학자 게랄드 휘터는 말합니다.
“인간관계를 개선하면 과거 뇌의 회로들이 두뇌에서 새롭게 연결된다. 즉 뇌에 새 신경로가 만들어진다.”
감정은 신경의 과도한 흥분에 불과하며, 이 흥분을 조절하는 법을 배운다면 관계의 악순환도 선순환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각자 자신의 과거 기억이 주는 자신만의 해묵은 시선을 가지고 있고,
이것은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과 인간관계의 반복되는 패턴에 영향을 미칩니다.
자신만의 안경을 벗어버리기 위한 방법으로 요즘 들어 명상, 요가가 인기를 끄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심리치료사들은 이를 두고 “동일시에서 탈피한다”고 말합니다.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 자신뿐
가정폭력피해가정에 흔히 발생하는 패턴은, 나중에 자녀가 부모로부터 독립하여 자신의 가정을 꾸릴 때가 왔을 때, 성숙하지 못한 부모와 자식 간에 겪는 분리불안입니다.
무언가가 비어있다는 결핍감을 알기에, 자연스러운 분리 과정이 이뤄지지 못합니다.
이것은 각자가 자신의 행복으로 나아가는 것을 주저하게 되는 요인이 됩니다.
어렸을 때 제대로 충족되지 못한 결핍의 빈자리를 메우고 싶으신가요.
안타깝지만 이제 와서 아무리 갈망해도 상대는 결코 우리에게 충족을 주지 못합니다.
기억하세요. 상대가 스스로 바뀌려 하지 않는 한 상대를 변화 시킬 수는 없습니다.
또한, 그대가 진정 책임져야 할 사람,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그대 자신뿐입니다.
모든 사람은 자신에게로 돌아갈 시간이 필요합니다.
다른 사람이 원하는 착한 누구 누구가 아닌, 자신만의 정체성, 진정한 나로서의 인생을 살아보고 싶다면, 다른 사람이 원하는 것이 아닌, 그 어느 누구보다도, 진정한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들여다 봐야 합니다.
이렇게 대응할 때 죄책감이나 자신이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올라온다면 그것이 외부로부터 주입된 산물임을 기억하여 객관화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부모 자식간에 관계와 부부 관계도 가족이기 이전에, 결국은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라는 것을 떠올리는 것이 도움이 될 겁니다.
부모와 자식, 그리고 배우자는 각자 나름의 욕구를 지닌 타인이며 사람마다 각자의 개인 여정이 있습니다.
자신이 먼저 성장과 치유를 결심하면
자신이 먼저 성장과 치유를 결심하면, 상대 또한 언젠가는 자신이 목격한 본보기를 통해 좀 더 나은 이해를 가지고 더 나은 삶을 향해 좀 더 쉽게 이동할 수 있습니다.
결국 부모 혹은 배우자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아낸 것 자체만으로도, 더 높은 차원에서 그들의 상처까지 치유하는 것이 되는 것이고, 이것은 세대의 대물림을 끊어낼 기회입니다.
그대가 원한다면 그대는 여전히 그의 주변에 있을 수 있습니다.
자신과 그에 대한 자신의 반응을 살펴 보세요.
그대가 그에 대해 불편함이나 애착을 느끼는 어떤 반응적 패턴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것을 볼 때 그의 주변에 있는 것으로 방해 받지 않습니다.
그대는 관계에서 이전보다 더 나은 표현 방식으로 그것을 표현할 수 있고, 그의 곁에 있는 것이 그리 부담스럽지 않습니다.
일 년에 몇 번 가족 행사에서,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꽤 가능합니다.
가정폭력피해가정에 드리고픈 마지막 사랑의 말씀
모든 사람은 신성한 창조 권능을 부여 받아 상위 법칙과 완벽한 질서로 이루어진 시스템 안에 거하고 있으며, 성장과 리듬, 양육, 요구의 충족, 생존 등의 놀라운 지성적 창조 권능이 날마다 우리 몸을 통해 역사합니다.
이것이 생명의 본성입니다.
이것이 원활히 작동되지 못하도록 막거나 왜곡하여 스스로 감옥
안에 자신을 가두고 있는 것이 인간일 뿐입니다.
우리가 당장 과거를 바꾸거나 어렸을 때 부정적인 사건을 없던 걸로 되돌릴 수는 없겠지만, 우리 자신을 변화 시킬 수는 있습니다.
우리는 삶에서 어긋난 것을 바로잡아 정비할 수 있으며, 잃어버렸던 진정한 자신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만약 그렇게 선택하고 꾸준히 성찰해 나아간다면, 오히려 평탄한 삶만을 살았던 이들보다 더 큰 승리와 빛을 창조해낸 것이라는 것을 고대부터 현자들은 알고 있습니다.
중요한 차이를 일으키는 것은 의식이고, 그것을 아는 체험은 자아감을 확장시키는 매우 큰 가치를 만들어냅니다.
나무 또한 하늘로 솟는 만큼 땅 속 깊이 뿌리를 내립니다.
낮은 것은 높은 것으로 변형되어집니다.
낮은 것은 이미 그 속에 높은 것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존재로서,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인식이 바로
그 변형을 가능하게 하는 힘을 제공합니다.
이것에 대한 이해를 적용해보고 실제 그들 자신을 통합해낸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본보기와 실험을 통해 이미 입증되었듯,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가능한 일입니다.
'한 사람이 이룬 일은 모두에게 가능'하니까요.
만약 이 글을 읽으시는 분께서 만약 가정폭력피해가정의 구성원이시라면
앤코이는 이 말씀을 전해 드리고 싶습니다.
"그대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그대는 매우
용기 있는 영혼입니다.
앤코이는 바로 그대가 다세대 전수 되어 왔던 폭력을 끊어낼 주인공이라 생각합니다.
어쩌면 그대는 인간적인 깊은 사랑으로, 가족 구성원에게 삶의 더 나은 방향을 본보기 보이고, 잠시 동안 그들을 돕기 위해 어려운 인생 초년을 택한, 아주 성숙한 영혼인지도 모릅니다.
그러한 것은 오직, 내면의 용기와 연결성을 가진 강한 사람만이 맡을 수 있습니다.
만약 그런 분이 이 글을 발견했다면, '이제는 이전의 역할극에서 벗어나, 자신의 진정한 회복으로 들어설 때이다' 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것을 제대로 숙고해 볼 수만 있다면, 그대는 반드시 현재 상황들을 벗어나 더 높이 성장할 추진력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대는... 절대 혼자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