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VII) 트라우마(상처)에 잠재 되어 있는 변혁의 힘 (신청서 3번 질문의 참고글)
앤코이 교육재단 2023-03-08 02:53 849
트라우마에 잠재되어 있는 변혁의 힘(신청서 3번 질문의 참고글)
트라우마는 누구에게나 일어난다
삶은 예측할 수 없고 제멋대로이며, 일일이 우리의 감정이나 상처를
배려하지 않습니다.
트라우마는 실패나 잘못이 아니며, 불행한 사람에게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내면의 실패 역시 아니며, 부끄러워해야
할 일도, 나약함의 증거도 아닙니다.
하지만 생로병사는 누구에게나 일어나며, 누구나 나름대로의 상실과 고통을 겪습니다.
트라우마의 어원은 그리스어로, '상처'라는 뜻을 가졌습니다. 우리는 트라우마를 흔히 전쟁이나 성폭력, 고문 등과 같이 끔찍하고 잔인한 경험과만 연결 짓지만, 이것은 한 단면일 뿐입니다.
트라우마는 생각보다 널리 퍼져 있습니다.
일상에서 흔히 겪는 고통과 두려움, 외로움이 우리도 모르는 사이 우리들 마음에 트라우마(상처)를 남기고, 마음에 새겨진 트라우마는 우리가 인지하든 못하든 간에 지속적으로 우리 삶에 영향을 끼칩니다.
세상에는 창조적으로 살아가면서 삶은 살아갈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과거에 갇혀 창조적으로 살지 못하고 자신의 존재와 삶의 가치를 늘 회의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이성과 헤어졌을 때나 학교나 일터에서, 가까운 친구나 가족과의 갈등이 있을 때, 혹은 급히 타야만 하는 버스를 놓쳐버렸을 때, 모르고 물건을 떨어뜨려 발등을 찍었을 때, 운전할 때 같은 일상의 모든 상황에서도, 사람들은 처리되지 않은 감정을 종종 행동으로 드러냅니다.
해결되지 못한 트라우마는 체험의 문 앞에 기다리고 서서 자신을 표현할 기회를 엿봅니다.
그리고 그것은 정작 스스로가 거의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 일어나는 독특한 측면이 있습니다.
아기가 견딜 수 있는 좌절에 대해 배우지 못하고 받아들일 수 없는 불안만이 남아 성장한 경우에,
혹은 살아가면서 ‘진정한 자신’과의
연결을 놓쳤을 때, 사람은 무서워하고 불안해하거나 공격적으로 변하지만,
그 이유를 알지 못합니다.
트라우마는 어찌할 수 없는 감정, 밤에 은밀히 느끼는 감정, 어디에서 오는지 모르지만 마음을 물들이는 감정을 우리에게 남깁니다.
그런
감정이 없는 척하려고 애를 쓸수록 오히려 그런 감정의 포로가 될 뿐입니다.
모든 트라우마가 인간 존재의 불가피한 결과물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원초적 고통은 우리 모두에게 존재합니다.
사람마다 트라우마에 노출되는 횟수는 다를 수 있어도, 트라우마에서 완전히 면제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단지 그것을 어떻게 다루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트라우마에 잠재되어 있는 변혁의 힘
그간 서양 심리학에서는 만약 트라우마가 생긴 이유를 잘 알게 되면, 소위 정상적 상태라 가정된 어떤 평정 상태로 돌아올 수 있다고 여겨 왔던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간 심리를 단순히 정상 심리와 비정상 심리로 나누고, 현재 보여지는 것에 기반해 비정상적 심리에 초점을 맞추는 방식이라면 그것에는 자칫 왜곡되기 쉬운 한계점이 있기에, 인간의 잠재력을 충분히 표현하는 데까지 도달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것을 미리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만약 트라우마를 삶의 불가피한 부분으로 인정하고, 열린 마음으로 자아 통달 훈련의 발판으로 이용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어쩌면 이 고통마저도 생명의 본질로 통하는 도구로 승화시키는 법을 깨닫게 될 지도 모릅니다.
앤코이는 트라우마를 삶의 걸림돌로 보는 대신, 마음과 의식이 본래 갖고 있는 능력에 눈을 뜸으로서, 트라우마에 잠재되어 있는 변혁의 힘, 내면의 과학을 일깨우고자 합니다.
트라우마가 드러내는 진리
트라우마를 당한 사람은 그 일이 ‘오직 자기에게만 일어났다는 느낌’에 내동댕이쳐집니다.
이 느낌은 자기와 타인이 공감할 만한 경험 사이에
간극을 만듭니다.
“트라우마를 당한 사람의 세계는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의 세계와 같은 기준에서 비교할 수 없다.’는 로버트 스톨로로우의 말처럼, 트라우마는 깊은 간격을 만듭니다.
그 틈에서 홀로 동떨어져 있고 고독하다는 괴로운 마음이 생겨납니다.
트라우마를 당하면 일상은 악의적 확신으로 변합니다.
그 견딜 수 없는
고통에서 더러움, 무가치함, 고독, 제멋대로이고 비인간적임 등과 같은 ‘지속적이고, 파괴적인 의미들’에 빠집니다.
트라우마에 직면하면, 흔들리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에 힘이 부치고, 참으로 이루기 힘든 바람임이 드러나기에, 존재 밑바닥에 놓인 견딜 수 없는 고통이 적나라하게 솟아오릅니다.
그러나 트라우마는 모든 환상을 깨버리기에, 한편으로 진리를 드러냅니다.
이게 과연 무슨 말인지 이제부터, 트라우마를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들었던
고타마 붓다를 주목해 이야기를 이어가려 합니다.
그의 인생과 가르침은 불교나 명상법에 대해 전혀 모르거나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도 굉장한 도움을 줍니다.
고타마 싯다르타가 가졌던 트라우마
트라우마를 풀어내는 작업은 사실 불교 밑바닥을 통해 현대까지 흘러왔습니다.
여기서 잠깐 불교 밑바닥이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불교가 보편화된 문화에서도
이런 점이 충분히 인식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고타마 붓다(나이 듦과 질병, 죽음
등과 같은 고통의 해결책을 모색하기 위해 화려한 궁전생활을 포기한 남부 아시아의 왕자 고타마 싯다르타)의
어머니는 그를 낳은 뒤 7일만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신화에 의하면 그는 마야부인에 옆구리를 통해 태어나자마자 조신하게 일곱 발자국을 걷고 하늘을 향해 손가락을 뻗어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고 외쳤다 합니다.
(흔히들 천상천하 유아독존으로 알고 있지만, 뒤에 잘린 문장이 있다. 이어붙이면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가 된다. 이를 직역하면, "이 세상에 오직 나만이 존귀하고 삼계가 고통속에 있으니 내가 마땅히 평안케 하리라"는 뜻이다.
'유아독존'이라는 말은 말 그대로 나 홀로 존귀하다는 뜻인데, 이는 진여, 불성 차원의 선언으로서, 석가모니가 개체적 인간으로서 홀로 존귀하다는 말이 아니다. 현상세계 모든 것이 이미 불성의 현현임을 전제로 하고, 석가모니가 이러한 가르침을 대중에게 설파하여 고통 속에서 해방되도록 하겠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평안케 한다는 것은 현상세계의 어떠한 행위를 통해서 도달한다는 개념이 아니라, 본인들이 이미 부처임을 모르는 무명을 벗어나게 하는 가르침을 말한다. 이러한 무명을 벗어나게 하는 석가모니의 가르침은 바로 연기법이라는 구체적인 수행 방법을 통해서 펼쳐진다.
붓다의 일생을 다룬 신화와 전설은 이외에도 참으로 많습니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그 신화와 전설에 비해서, 붓다의 생모가 일찍 숨을 거두었다는 사실을 명징하게 들여다보는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다음 인용하는 구절은 팔리 경전에서 뽑은 것입니다. (팔리 경전은
제자들이 가르침을 암송을 통해 온전히 보전해 오던 것을 수백년 뒤 제자들의 결집에서 확인하고 처음으로 문자로 기록한 것을 말한다.)
앙굿따라 니까야에서 붓다는 자신을 보살펴준 아버지와 이모를 회상하며, 성장기
시절 자신의 연약한 자질을 표현합니다.
나는 연약하고, 정말로 연약하고, 말할 수 없이 최고로 연약했다.
아버지 집에는 오직 나를 위해 조성된 백합 연못이 있었다.
한때는
푸른 백합이 피고, 또 다른 때는 햐얀 백합이 피고, 세
번째로는 붉은 백합이 피었다.
나는 바라나시에서 온 백단향이 아니면 사용하지 않았다.
터번, 긴 옷, 하의, 외투는 모두 바라나시산 천으로 만들었다.
하얀 차양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나를 가려주었다.
추위, 더위, 열, 먼지, 모래, 이슬로 인해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
그리고 뒤이어 자신의 주도권을 지켜내기 위해 투쟁하는 자아의 모습,
어쩌면 현대의 정신분석가들이 말하는 거짓자아(false self)에 처음으로 균열이 생겨난 것에 대해 묘사합니다.
(*원본에는 늙음과 질병, 죽음에 대하여 각각 하나씩 숙고해 보는 변화의 과정으로 나열되어 있습니다. 늙음, 질병, 죽음이라는 단어 외에 나머지는 똑같이 반복되는 패턴의 글이며, 스크롤 압박 부담의 예상으로, 늙음, 질병, 죽음을 하나로 묶어 적은 것이니, 이 점 꼭 참고하세요.)
나에겐 그런 힘과 행운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생각했다.
‘늙음, 질병, 죽음에 지배 당하고 늙음, 질병, 죽음에서 안전하지 않은 무지하고 평범한 사람이
늙어가거나 질병이나 죽음에 지배되는 다른 사람을 볼 때,
충격을 받고 치욕스러워하고 혐오감을 느낀다.
왜냐하면 그 자신도
예외가 아니라는 것을 잊었기 때문이다.
나 역시 늙음, 질병, 죽음에 지배 당하고 늙음, 질병, 죽음에서 안전하지 않지만,
늙음, 질병, 죽음에
지배 당하는 다른 사람을 볼 때 충격을 받거나 치욕스러워하거나 혐오감을 느끼지 않는다.’
이렇게 생각하자, 젊음, 건강, 삶의 자만심은
완전히 나에게서 멀어졌다.
그의 아버지는 고타마가 죽음과 늙음, 질병을 보지 못하도록 인위적으로 완전히 차단된 백합 연못가에서 홀로 방해 받지 않고 양산 아래 보호 받으며 음악과 진수성찬을 즐기도록 했습니다.
겉보기에 안전한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붓다는 자기 고백에서 그랬듯, 사실 연약했습니다.
그러나 궐 밖으로 나가 처음으로 생로병사의 현실을 목격했을 때 그는 큰 충격을 받았고, 이후 그의 인생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아내와 갓난아기를 두고 출가를 결심하게 됩니다.
이후 붓다는 고통에서 해방되는 해탈을 위해 6년간의 고행을 했었습니다.
당시 지배적인 철학 사조는 육체의 욕망으로 편안한 만족을 누릴 수 없고, 해탈을 누리기 위해서 세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해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물론 붓다는 6년의 수행끝에 이러한 고행이 쓸모없다는 것을 깨닫고, 이전의 관행과 관점들을 온전히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붓다 깨달음의 근본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많은 영성가들과 정신분석학자들은 거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붓다가 했던 고행들이 고타마 붓다께서 깨닫기 이전 그에게 나타났던, 스스로에 대한 공격성이기도 하다고 밝히는데요.
당시 붓다는 자신의 털이 썩어가는 듯 하고, 머리카락은 뭉텅이로 빠지고, 몸은 대소변을 볼 때 꼬꾸라졌다고 표현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이것은 위니컷(D.W. Winnicott, 영국의 소아과 의사이자 아동정신분석가)이 언급한 무자비한 자아의 측면과도 상통합니다.
그는
그의 논문에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정상적인 아기는 엄마와 무자비한 관계를 즐기며 대개 놀이양상에서 드러난다……
그러나 엄마와 이렇게 놀지 못하면 아기는 자신의 무자비한 자아를 숨길 수 밖에 없고 오직 해리 상태에서만 그 자아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여기 해리라는 단어를 주목하세요. 잠시 뒤에 더 이어가겠습니다.
위니컷은 이에 더하여, 부모와 친밀한 관계를 상실한 아이는 그 상실감을
생각이나 기억이 아니라 감정으로 내면화한다고 했습니다.
고타마붓다는 소위 ‘정상’적인 삶으로 인위적으로 내몰려 트라우마를 받을 가능성을 차단 받거나, 아무리 피하고 싶다 해도, 그것은 절대 피할 수 없음을, 그리고 이런 진리에 직면해 환상에서 벗어나 솔직하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트라우마를 대한다면, 트라우마가 주는 위협에서 훨씬 잘 벗어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좁은 곳에 갇혀 있던 자신을 오히려 활짝 꽃 피울 수 있다는 본보기를 보였습니다.
그는 세상 사람들이 자아 중심적 자기만족뿐 아니라 허무주의나 자기 의심, 자기
증오, 부정에 빠지지 않고 트라우마를 견디는 방법을 발견했습니다.
붓다가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 때문에 고통을 겪었다는 구체적인 증거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어머니의 죽음으로부터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을 수는 없었습니다.
자신이 말할 수 없이 최고로 연약했다고 말하는 붓다의 자기 고백에서 드러나죠.
고타마는 늙음, 질병, 죽음에 직면해 충격을 받았고, 심한 모욕감을 느꼈으며, 구역질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당시 문화적 관습에 따라 다루었습니다.
고통을 해리시킨 후 살아가지만, 고타마의 연약함은 그것이 효과적이지 않았음을 말해줍니다.
고타마는 자기의식에서 질병과 죽음을 차단했다가 그것에 처음 노출되었을 때 삶 아래에 놓인 불안정성을 직면하고, 갑자기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절감했습니다.
고타마가 출생 후 친모를 여의었다는 것과 스스로 자신에게서 도망가고자 애쓴 상황을 두고 정신과 의사인 마크 엡스타인은 이것이 어린 시절 상실에 따르는 알 수 없는 소외감이나 불안감이라는 주제와 연관되며, 해리라는 심리방어를 드러낸다고 말했습니다.
사실 정신분석가이면서 불교 지식이 풍부하고 명상 수행으로 다져진 그의
입장에서, 고타마 붓다가 겪은 인생 초기의 상실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해리는 자아가 분열되는 것을 피하려는 생존기법으로, 감내할 수 없는 긴장 혹은 감정이 밀봉되어 나머지 자아와 분리되는 것을 말합니다.
충격을 받은 일부 자아가 전체 자아의 생존을 위한 희생양이 되어 영원히 멈춰진 상태로 일정한 심리 공간에 보내지는 것이죠.
그것은 그렇게 분리, 차단되고 봉쇄되어 침묵 속에 던져집니다.
자아가 받은 견딜 수 없는 상처는 본질적으로 트라우마를 받은 당사자가 처리하고 이해하고 다스릴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섭니다.
자아는 계속 잘 기능하기 위해 스스로 상처를 잘라내고, 트라우마가 주는 불안을 해리시킵니다.
이러한 자아 보존 전략을 서구 심리학에서는 ‘자아 방어(ego defence)’라고 부릅니다.
이 과정은 PTSD(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서도 흔히 관찰됩니다.
문제는 해리된 자아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인데, 회복탄력성이 길러지는 것을 막고, 해결되지 않은 상태로 늘 뒤에서 도사리며, 이 때문에 자아는 해리된 부분이 의식에 떠오르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막대한 에너지를 소비합니다.
이것은 사실 불교계가 붓다 일생의 핵심 요소인 상실에 무관심하다 못해, 붓다에게
마치 영아기가 없었던 것처럼 해리시킨 현상에서도 보여집니다.
붓다 탄생 설화에서는 붓다가 바로 두세 살이 된 것처럼 태어나자마자 분명히 걷고 말하고 생각한다고 묘사하는데요.
이를 두고 마크 웹스타인은 한 문화의 방어기제, 즉 무상의 진리에 익숙한 문화권에서 고통을 해리하려는 욕구가 있다고 말합니다.
또한 킴 마이클즈는 ‘죽은 구루 신드롬’에 대해 메시지를 전합니다.
진정한 영적 스승들은 살아 생전 본인을 우상숭배하는 것을 단호히 금지시켰습니다.
하지만 구루(힌두교, 불교, 시크교 및 기타 종교에서 일컫는 스승으로, 자아를 통달한 신성한 교육자를 지칭함. 출처: 두산백과 두피디아)가 죽고 나면 제자들은 이 가르침의 본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들의 스승이 얼마나 특별했고 완벽했는지 그들 자신의 꿈과 환영을 투사하곤 했습니다.
의식했든 의식하지 못했든 간에, 자신들의 그루가 더 특별할수록 그루의 추종자들이
더 특별해진다 여겼기 때문이었죠.
고타마 붓다가 특별하지 않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가 달랐던 것은, 그는 생명의 강과 함께 흐르고 있었고, 생명의 강(실재로서 전체, 불성 혹은 성령이라고 말할 수 있음)의 목적지가 곧 자신의 목적지임을, 그리고 자신이 발견한 그것이, 그 특별함이 모든 이의 내면에도 잠재력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붓다는 해리라는 방어기제가 최종 해결책이 되어서는 안되고, 설사 트라우마를 받았더라도 총체적인 인격을 가진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몸소 본보기 보였습니다.
발달 트라우마 전문가들은 말합니다.
“내면의 대상 세계에 사로잡힌 고통이 너무 커서, 그것을 부수고 나와
자유롭고 싶은 열망이 아무리 절박하다 해도, 이미 형성되어 있는 증오되고 부정된 자아 부분과 직면해
그 자아를 다시 자기 것으로 통합하지 않는다면, 지금 이 순간 완전한 삶을 실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자아에서 증오되고 부정된 부분은 초기 대상과의 애착관계에서 형성된다.”
트라우마에서 빠져나오는 마음의 능력
붓다가 고통의 보편성을 선포한 것으로 유명하지만, 붓다의 가장 혁명적인 선언은 자유입니다.
그는 인생의 진정한 본질은 축복이라고 말했습니다.
고통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생각하고 반응하는 방식에 달려 있음을 언급했습니다.
붓다는 아주 예리하고 영민하게 마음을 탐구했습니다.
오늘날 정신과 의사와 뇌 과학자들은 이제야 겨우 붓다에 근접했죠.
그는 자아성찰이라는 마음의 능력이 트라우마에서 빠져나오는 길을 발견하는 데 핵심적이라는 것도 이해했습니다.
붓다는 진정한 스승입니다.
깨달음 이후 그는 그것을 자유롭게 베풀었습니다.
붓다가 가르쳤던 마음챙김 수행은, 자아의 중심점이 사고하는 마음에서 호흡이나 우연히 들리는 소리처럼 중립적인 대상으로 지속적으로 옮겨가기 때문에, 해리 현상을 치료하는 전문가들의 증언처럼, 트라우마에 반응하는 자아가 중립지대에 놓이는 효과를 줍니다.
처음에는 중립적인 대상에 주의를 집중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그 다음에는 무언가 조절하려고 애쓰기보다는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는 인식 상태로 편안하게 이완하는 상태를 배웁니다.
자아의
지위가 줄어들면서 각성한 의식은 예상 밖의 놀랍고 새로운 내용으로 채워집니다.
이것을 반드시 독방에 하루 종일 홀로 앉아 가부좌를 틀고 해야 하는 것으로 너무 부담감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일상생활 속에서 걷고, 음식을 먹고, 이동하면서도 적용해볼 수 있는데, 인간이라는 존재는 자신을 성찰하면서
동시에, 무엇이 일어나는지 스스로 관찰할 수 있는 특수한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사고나 감정, 신체감각의 모든 것을 인식이라는 관찰의 장으로 가져와 모든 판단을 중지하고, 중립적인 입장으로 들여다보는 수단입니다.
이것은 또한 우리가 오늘날 ‘무의식’이라고 부르는 것을 의식화시키는 것일 뿐 아니라, 의식적인 것을 더욱 의식적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런 종류의 자기인식에 도달하면 마음은 모든 비밀을 드러냅니다. 이완과
관찰이 균형을 이룰 때, 우리의 사고 기능과 마음에서 해리된 모든 것 사이 존재하는 틈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멍한 백지 상태도 아니고, 감정에 그저 굴복하는 것도 아닙니다.
짜증나고 화가 날 때, 좌절되고 불안할 때, 감정을 탐색하면서 ‘누가’ 이런 감정을 느끼는지 찾는 노력을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정말 누구인지 아는 것을 방해하는 ego를 드러내는 과정입니다.
감각적 쾌락이 불결한 것이 아니라, 사람은 불안을 달래기 위해 감각적 쾌락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쾌락이 문제가 아니라, 집착이
문제인 것입니다.
울음이 나오면 울음을 허용하세요.
울음으로써 이해받는 경험은 해리하는
감정에 공간을 만들고, 정신의 성장을 가져옵니다.
이완과 탐색 사이에 균형, 여기에 호기심을 더하면 우리는 그 불편했던 체험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불편함을 그저 누르고 무력화시키는 대신, 그것에 주시를 불어넣으면 치료가 일어난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한 종류의 감정을 차단하면 결국 모든 감정을 차단하게 됩니다.
자신을 트라우마의 참을 수 없는 감정에서 보호하려면 사랑이나 기쁨, 공감에도 문을 닫아야 합니다.
인간은 감정에 기거하기에, 이것을 아는 것은 우리의 인간성을 되찾게 합니다.
자기손상을 극복하는 수단으로, 우리 안 분리된 조각들을 통합하여 하나로, 완전체가 되는 기회입니다.
이것이 붓다가 아내와 갓난아기를 뒤로 하고 출가해서 자신의 트라우마와 반복해서 부딪히며 6년을 보낸 끝에 발견한 깨달음입니다.
비감각적 감정(정체감)이
핵심
붓다는 감각적인 감정과 비감각적인 감정을 구별함으로써 자유로워졌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감각적인 감정은 즐겁거나 즐겁지 않거나 혹은 불쾌하거나, 신체 또는 마음에 기반을 둔 감정입니다.
그리고 비감각적인 감정은 붓다가 신체적인 것 외 발견한 새로운 즐거움이었는데, 존재 그 자체와 더 많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감각으로 인지되는 환경에
대응하여 일어나는 감정이 아니라, 우리가 진정 누구인지에 초점을 맞추고 우리 개개인의 정체성, 무한한 생명력, 생명의 강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감정입니다. 누군가는 그것을 불성이라 부르고, 누군가는 성령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능력을 회복한 붓다는 우리가 에고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진정한
정체감과 본성에 연결되면 깨어있는 의식에 충만해지고, 이 에너지에 한계가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 상태에서 그는 안정감과 신뢰감, 자신감을 느낄 수 있었고, 어떤 것이라도 명징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그는 명상 가운데 관찰자이면서 동시에 관찰대상이 되고, 주체과
객체의 경계를 넘나들수록 자신의 진정한 본성에 더 가까이 갔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균형’으로, 우리의 진정한 정체감과 연결되었을 때, 우리는 평정과 활력, 마음의 편안함, 용기와 불굴의 정신을 얻어 자기 내면의 즐겁지 않은
부분을 의식 속으로 수용할 수 있습니다.
고타마 붓다는 이 비감각적인 감정을 마음챙김의 핵심으로 삼으라고 가르쳤습니다.
그 역시 이 즐거움을 통해 고통과 함께 살아가는 새로운 방법을 성취했고, 공포에서 도망가는 대신, 공포를 탐구할 수 있었습니다.
자신을 이런 식으로 재정립함으로써, 붓다는 자신이 인생에서 가장 원했던 것을 성취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시대의 정신치료 전통과 같은 계보에 확고히 섰습니다.
그는 한 사람에서 다음 사람으로 트라우마가 전이되는
무의식적인 범죄를 단절하는 데 아주 능숙한 솜씨를 보여주었고, 오늘날 가장 뛰어난 트라우마 치료사보다
훨씬 앞선 업적을 이루었습니다.
스스로의 심리적 엄마가 되어주기
한 가지, 이 비감각적인 감정이 대체로 아주 어린 시기, 영아기에 형성된다는 것입니다.
넉넉하고 편안한 양육 환경에서 부모는 아기에게 편안함과 위안을 주고 아기가 감정을 잘 흘려보내도록 도와줍니다.
여러분 중에는 붓다처럼 어린시절 엄마가 돌아가신 경우도 있을 것이고, 엄마와
친밀하지 않았다거나, 영아기 시절 부모로부터 충분히 푸근하고 편안한 환경을 조성 받지 못했던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붓다가 사태를 명징하게 보되 그것을 과도하게 실재로 여기지 않았던 것은, 마치
사려 깊은 엄마가 아기의 초기 감정을 아기가 스스로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거울처럼 약간 비틀어 보여주는 것으로 적절하고 조화롭게 반응하는 엄마의
태도와도 같습니다.
우리는 그의 가르침처럼 우리 '의식'의 알아차리는 능력을 바탕으로, 감정의 전 범위를 아우를 수 있는 편안하고 푸근한 환경을 스스로도 조성할 수 있습니다.
고타마 붓다가 그랬듯이, 우리도 스스로 자신의 심리적 엄마가 되어 줄 수 있습니다.
즉, 어릴 때 육신의 부모로부터 마땅히 받지 못했던 것이 여러분을 규정하지 못하도록, 스스로를 재-양육하는 과정을 거칠 수 있습니다.
고통과 함께 하는 방법
명상을 하면 종종 어린 시절 트라우마의 찌꺼기가 깨어있는 의식으로 불려나오곤 합니다.
명상은 그것을 새롭게 경험하는 과정이라는 것을 기억하세요.
중요한 것은 그대가 체험하고 있는 ‘내용’이 아니라, 핵심은 그대가 ‘누구’이며(진정한 자신이 누구인지), 그것과 ‘어떻게 관계하는가’입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만나는 어려움을 극복하는데 도움을 얻고, 삶
자체를 근본적으로 전환시킵니다.
자기 내면에 없애고 싶은 어떤 감정이 올라올 때, 그것을 교묘히 해리를 통해 그 감정으로부터 살짝 떨어져 있는 것은 우리가 흔히 해오던 방식입니다.
하지만, 그 대신 그 감정을 적이 아닌 주시의 대상으로 삼아봄으로써, 우리는 진실로 진전을 이룰 수 있습니다.
천천히, 호흡의 흐름 안에서 그 감정이 자연스럽게 오가도록 둘 수 있습니다.
한번 그 감정과 함께 있어 보고, 만약 견디기 힘들다면 호흡으로
다시 돌아오면 그만입니다.
스스로 푸근하고 편안한 환경을 만들어내는 법을 배우고 그 관점으로 대상을 바라보면, 마음을 가라앉혀주는 무언가가 반드시 생겨납니다.
고통과 함께하는 법을 배우는 것, 그 감정에 사로잡히거나 수치심을
느끼지 않고 스스로 주인이 되는 방법입니다.
마음챙김 수행을 하는 동안 꿈은 종종 정서체험을 드러내고 소화하는 수단이 되기도 하고, 우리는 다른 방식으로 꿈 속의 자아를 관찰하는 기회를 얻기도 합니다.
이 때 꿈은 잊어버리고 싶었던 우리 모습을 보여주는 동시에 트라우마의 일부를 처리하고 해소하기도 합니다.
꿈은 프로이드가 확인한 바와 같이, 종종 무의식으로 가는 왕도가 되어 줍니다.
자기 전 자신의 상위 자아에게 기도로서 질문을 올려드리고 이후 잠에서 깨어났을 때, 혹은 일상생활을 하다가 문득 이전에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어떤 새로운 관점이 들어왔는지, 스스로를 관찰해 보는 것은 꽤나 의미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 게시글을 실천하는 동안 그러한 경험을 신청서에 적어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알아차림, 기억이 발휘하는 재결합의 힘
순간순간 일어나는 것은 무엇이라도 알아차리도록 시도해보세요.
기억함(re-member)으로써 우리는 이전에 해리한 것을 다시 자아로 불러들여 재결합합니다.
트라우마 체험은 오로지 암묵 기억에서 일어납니다. 암묵 기억에 대해 잠깐 언급해보자면, 기억에는 기본적으로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암묵 기억과 외현기억입니다.
암묵기억은 개념적 사고와 의식적 인식을 담당하는 고위 피질 중추에서 멀리 떨어진 뇌의 깊은 부위에서 이루어집니다.
이것은 출생 후 18개월간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기억이고, 운동 기능뿐 아니라 관계적 지능과도 연관됩니다.
외현 기억은 몸을 통해 직접 매개되지 않고 사고를 통해 다뤄지지만 트라우마의 경우, 뇌의 고위 중추에서는 절대 처리되지 않습니다.
트라우마에 대한 기억은 몸이나 무의식적인 기억에 트라우마가 남긴 흔적을 거쳐서만 접근할 수 있습니다.
마음챙김의 ‘알아차림’의 ‘기억’이라는 요소는 암묵기억과 외현 기억 사이에 다리를 놓아줍니다.
해리된 파편들을 모아 당사자에게 되돌려줍니다.
예술가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은 암묵기억에서 외현기억으로 가는 통로가 열리면 환희로운 회복이 가능하다고 글에서 밝힌 바 있습니다.
트라우마는 보통의 기억 속에 담기지 않으면서도 변함없이 계속 마음의 구성 체계에 영향을 끼치는 점에서 중요합니다.
이런 정서들이 흘러 다니는 신경 경로는 뇌의 깊숙한 곳에 있는 편도체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의식적인 사고의 영향력 밖에서 작동합니다.
스톨로로우가 말했듯, “트라우마 경험은 영원한 현재에 엉겨 얼어붙어 틀을 형성”합니다.
여러분이 만약 '의식의 연결성'을 제대로 회복한 상태에서 마음챙김을 한다면, ‘알아차림’은 이런 경향을 깨뜨리고,
트라우마 체험으로 얼어붙은 마음 상태에서 벗어나 ‘현재’라는
시간 속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게 해줍니다.
정신분석가 마이클 아이젠(Michael Eigen)은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의 감정 상태가 절망이라면, 절망에 빠질지도 모른다는
사실보다 그 절망을 대하는 그의 태도가 더 중요하다. 근본적으로 그 절망을 배려하고 보살필 때, 절망은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 자기 이야기를 풀어낸다. 그러면 절망과
깊은 대화를 할 수 있다. 이런 과정을 지속하면, 그 절망의
속성이 변하는 것을 속속 느낄 수 있다. 왜냐하면 절망은 한 모습으로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존재하는 능력
앤코이가 계속 정체감을 이야기 하는 데에는 많은 이유가 있습니다.
존재에 기반한 안정된 자신감은 창조적 충동을 열어주며, 즐거움 속에서 자발적으로 양분이 되는 체험 속으로 녹아 들게 합니다.
하지만 이 능력이 없다면 자아는 그 본질상, ‘남성적’으로 됩니다. (남성성이 이원성으로 인해 왜곡되는 것을 말합니다.)
즉 행동에 의존하고, 경직된 자세로 일상생활에 임하고, 스스로와 더욱더 불편한 관계를 맺습니다.
그것은 통제하고 정복하는 힘이기도 합니다.
모든 사람 안에는 남성적 요소와 여성적 요소가 있다는 것을 알아 두세요.
위니컷은 행동하는 남성적 요소와 존재하는 여성적 요소의 균형이 필요하다고 보았습니다.
오염되거나 왜곡되지 않은 순수한 여성적 요소는 우리를 ‘존재’로 이끕니다. 이것은 진정한 자기 발견과 존재감의 유일한 기반입니다.
그렇게 내면이 발달하여 우리는 스스로 ‘보듬는 자’가 됩니다.
암묵 기억은 모든 사람 내면에 ‘존재’라는 여성적 요소와 관련 있습니다. 마음챙김은 자아를 중립적인 관찰 장소로 옮겨, ‘남성적 요소의 왜곡된 측면’, 즉 Ego에게 무언가 할 것을 준 다음, 감각기관을 통해 들어온 가공되지 않은 체험 (즉, 판단을 배제한)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내면 환경은 ‘엄마와 아기’의 초기 관계를 닮은, 편안하고 수용적인 모습으로 조성됩니다.
붓다와 같은 방식으로 주의를 기울이면, 암묵 기억은 자신을 표현할 기회를 얻습니다.
힘든 면을 외면하지 아니하고 알아차리고 안아주면, 그 에너지는 누그러져
말썽을 적게 일으키고, 그 얽매임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열립니다.
숨은 능력이 드러나려면
고타마 붓다가 완전히 깨달음을 이루기 전, 그는 자신으로부터 소외된 그 무엇과도 대면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이후 그 감정이 붓다를 꿈으로 이끌었습니다.
그는 꿈을 통해 자신이 연기적 존재임을 알게 됨으로서 진정한 본성에 눈을 떴습니다.
고타마 역시도 지상에 존재했던 여느 인간처럼 트라우마로 고통을 겪었지만, 그는
개인적인 노력과 지성을 바탕으로, 홀로 깨달음을 이뤄낸 진정한 본보기입니다.
그 꿈들은 사람과 '영' 사이의 관계성을 알아차리는 붓다의 능력이 그의 정신생활 전체를 물들일 때에, 깨달음이 가능했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고타마 붓다는 꿈에서 힌트를 얻어 깨달음으로 가는 여정의 균형을 잡는 데 이용했습니다.
그는 구도의 여정을 안정적으로 가는 데 필요한, ‘여성적 요소’, 모든 사람에게 잠재해 있는 그것을, ‘암묵 기억’에서 발견했습니다.
글이 훨씬 더 길어질 것이기에, 그 때 붓다가 꾸었던 꿈 다섯 가지를 일일이 열거하지는 않겠습니다만, 그 꿈을 통해 그가 무엇을 회복했는지 그에 담긴 상징성을 한번 살펴보는 것은 나름 의미가 있습니다.
고타마 붓다는 먼저 고타마 붓다가 어린시절의 기쁨과 창조성을 기억해 냈을 때, ‘존재’를 향해 자신을 열었고, 그것은 꿈에서 어머니를 상징하는 땅과 물로 나타났습니다.
그는 순수한 여성성, 모성적 자질을 회복했습니다.
다음으로 그는, 세상과의 단절이 아닌 세상과의 깊은 연결을 회복했습니다.
어머니와의 본래 관계를 회복한 후에 그에게 벌어진 것은, 자신의 본성인 연기적 존재 우위성의 재확인입니다. 다른 말로, 생명의 강에 합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기 연민을 '의식의 연결성에 대한 앎'으로서 회복하고, 인간이 본래부터 서로 이어진 존재임을, 다시 말해 세상과 동떨어져 홀로 존재하는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연기성입니다.
세 번째, 자신을 기억하는 능력을 향상시키는 과정을 통해, 고통은 되려 의식을 성장시키는 도구로 승화되었습니다.
그는 그것으로
진정한 스승이 되었고 존재를 활짝 꽃피웠으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고타마 붓다의 가르침이 현대에도 잘 맞는 점은, 그 시절 사람들은 육체를 학대 시켰고, 현대 시대 사람들은 정신을 학대하곤 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분노, 고통, 절망, 자기 증오의 감정들은 사실 우리들 안에 본래부터 갖고 있던 사랑에서 나왔다는 것, 그리고 그 모든 사랑과 사랑하는 능력은 여전히 우리 마음 속에 있다는 것을 고타마는 깨어있는 의식을 통해서 알았습니다.
여러분들도 고타마 붓다처럼, 깨어있는 의식을 통해 좋다 나쁘다의 이원성을 넘어서시길 바랍니다.
좋다 나쁘다는 대상의 특성이 아니라, 그저 대상에 대한 접근법일 뿐입니다.
슬픔은 어떠한 면에서, 행복이 결코 줄 수 없는 깊이를 줍니다. 그것은 존재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며, 그대의 중심에 도달해 관통합니다.
때로는 슬픔이란 형태로 그대에게 찾아와 심오함을 남겨주고 가기도 하며, 때로는 행복으로 다가와 웃음의 잔물결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살면서 짐작만으로 단정지은 자기 정체성에 묶이기 쉬운 현대인들이 그에게 배울 것은, 내면의 상처와 싸우는데 에너지를 허비하는 것을 그만두고 진정한 자신으로 돌아감으로써, 누구나 자신 안에 사랑, 그 무한한 힘에 다시 연결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내적인 결합(타고난 온전함을 되찾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정체성체에서 가장 높은 청사진과 일치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을 이루는 열쇠는, '의식의 연결성'을 제대로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 연결성 안에 의식적으로 '존재'할 때, 바라보는 모든 이원적이고 인간적 관념들로 오염된 삶의 수많은 정보와 기억들이 불성으로 대체되는 기적이 시작됩니다.
삶의 다양한 측면에도 불구하고 분리된 자아들을 모두 넘어설 때, 내적 결합이 형성됩니다.
트라우마를 경험한 자아는 조각조각
파편화되어 있기 때문에, 삶의 모든 영역을 수용하지 못하고 체험은 축소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존재를 꽃피우는데 장애로 보이던 것들이 이제는 그것을 지탱하는 바탕이 되었습니다. 자신에게서 최악의 것을 보았지만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존재로 나아가는 것은 어떤 것을 제거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을 가치 있는 부분과 가치 없는 부분으로 나누지 않습니다. 세상을 대하는 프레임이 바뀌어 모든 것이
밝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깨달은 이들은 바로 의식을 두고 '내면을 비추는 빛'이라 표현합니다.
깨달음은 사실 어려움의 종말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붓다의 전생 이야기를 기록으로 담고 있는 자타카(Jātaka Tales)에 의하면, 그가 극심한 고통과 폭력, 트라우마적 경험을 했었음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경험들은 주로 타락한 의식과 무지를 지닌 이들의 매우 파괴적이고 의도적인 공격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대반열반경》(Mahāparinibbāna Sutta)과 Vinaya Pitaka (율장)에 따르면, 붓다는 중년 이후 건강이 좋지 않았고, 다양한 질병을 겪어 말년까지도 종종 의사인 지바카(Jīvaka)의 진료를 받았다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거의 같은 시기 그의 사촌동생인 데바다타가 그를 따라다니며 여러 번 위해하려고 했었죠. 고타마 붓다의 아들 라훌라와 아꼈던 두 제자 사리불과 목건련은 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팔십 고령에 이르러 공양을 드시고 나서, 식중독에 걸려 돌아가시게 되었습니다만, 오히려 공양한 자를 축복하셨습니다.
어떤 분들은 의식의 높은 단계에 도달한 사람에게 왜 그런 일이 일어났지 라고 의문을 가지실 수도 있겠습니다.
깨달음이란 어떤 면에서, 트라우마와 어려움마저도 자기 초월의 기회로 삼는, 내면 방식의 변화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러한 '내면의 본보기'를 남기는 것이 타락한 의식을 가진 이들에게 카르마적 결과를 불러일으키고, 집단의식을 끌어올림으로써 인류에게 가장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하나의 중요한 과정, 초월적 사랑이었습니다. (비록 인류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해도 말입니다...... .)
육체는 물리 옥타브의 법칙에 따를 지언정, 진정한 존재 핵심은 그 상황이나 법칙에 종속되지 않는 그 이상의 존재임을 아는 내면의 결정 즉, '마지막 분리된 자아를 떠나보내는 결정'에 대한 본보기인 것입니다.
우리는 잠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함께 떠올려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상승'(인생 졸업)이란, 외면의 성취가 아닌 내면 의식 상승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대중들의 관심과 많은 가르침들이 생각보다 십자가 처형의 외부적 사건에만 거의 치중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많이 놓쳐왔던, 참 스승들께서 남기고 가신 진정한 메시지는 사실, 상징적으로 '십자가'라 말할 수 있는 4가지 하위체(육체, 감정체, 멘탈체, 정체성체)에 못박힌 유령들 즉, 분리된 자아들을 떠나보내고 초월하는 '내면적 본보기'였습니다. 앞으로 집단의식이 더욱 상승하는 시대에는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알아차리게 되는 시기가 올 것이라고 봅니다.
뇌 과학자인 질 볼트 테일러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과학의 신념과 영성의 경험 사이에 다리를 만들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분리된 자아를 내려놓고, 의식적 자아와 무의식적 자아를 한 팀으로 통합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떠날 여정, 그 전뇌적 삶으로 가는 길이, 바로 모든 인류가 떠나야 하는 영웅의 여정, 모든 인간의 과제입니다."
그녀가 이야기하는 영웅의 여정을 좀 더 확대해 본다면, 고타마 붓다의 삶 뿐만 아니라, 신청서를 작성한 이후에도 각자의 삶 속에서 계속 성장의 여정을 걸어나갈, 여러분의 삶에도 적용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분리된 자아가 품은 개별성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자아 중심성을 버리기로 결심하면, 영웅은 맨 처음 기원했던 우주적 의식의 바다 영역으로 녹아들게 됩니다. 영웅은 죽음에 대한 공포를 비롯하여 일상에서 집착해 왔던 분리된 자아라는 괴물과 싸우는 시기를 겪게 되기도 하지만, 이제 희열 가득한 우뇌의 지혜에 둘러싸여 여행이 준 앎을 자유롭게 얻습니다.
이 시점에서 영웅은 고향으로 돌아가 힘들게 얻은 전뇌적 지식을 널리 나눌지, 아니면 그냥 혼자 알고 있을지 선택하게 되는데, 영웅은 고향으로 돌아가 달라졌습니다. 이제 의식적 자아와 무의식적 자아 및 그들이 갈등하는 가치들을 다 인식하면서, 세상 속에서 어떻게 균형 잡힌 삶을 살아갈지 알아내는 것이 영웅의 과제입니다.
고타마 붓다는 마치 연꽃과도 같습니다. 연꽃 향기를 맡아본 적이 있으신가요? 기회가 된다면 연꽃이 있는 연못으로 가서 이 놀라운 꽃을 명상해 보세요. 아주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연꽃 씨앗은 진흙 속에서 꽃을 피워냅니다. 싹을 틔워, 줄기를 통해 수면 위로 떠오르고,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마침내 깨끗한 향기를 꽃 피웁니다. 연꽃은 비가 내려도 젖지 않습니다. 진흙탕물이나 세찬 바람에도 우아함과 고결함을 잃지 않습니다.
재단이 말하는 의식 성장의 과정이 마치 이것과 같습니다. 비록 현실이 진흙같고 세상 풍파와도 같은 이원적 망치가 세차게 내리칠 지라도, 끊임없는 의식의 상승 과정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그리고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마침내 존재의 연꽃을 피워낼 수 있습니다.
고타마 붓다는 ‘엄마와 아기’의
유대에 스며 있는 이런 능력으로 그 성취를 이루었고, 그의 진정한 가르침처럼, 그것은 모든 사람 안에 내재되어 있으며, 함양시킬 수 있습니다.
붓다가 꿈을 통해 후대에 밝힌 것은, 아기와 하나되는 엄마처럼 마음은 본질상 트라우마를 수용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마음은 무력감이나 두려움을 느낄 필요 없이, 자신을 다그치거나 적대적으로 굴 필요없이, 본능적으로 중도를 찾는 법을 되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연기적 존재임을 아는 마음의 능력은 잠시 잊혀질 순 있어도, 완전히 잃어버린 적은 없습니다.
그것은 드러나지 않았을 뿐, 본래부터 우리 마음 안에 있습니다.
우리 안에 본래 있는 연기성
우리는 내면에서 자신을 인식합니다.
우리의 생각 너머에 있는 자기에 대해 직관적으로 느낍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자리에서 다른 사람과, 이 세계와 관계를 맺습니다.
우리는 바쁘고 빡빡한 생활 속에서 대부분의 시간 동안 그것을 거의 인식하지 못하고 넘어가지만 그것은 언제나 우리의 배경에 있습니다.
그대가 잠을 자는 동안에, 대화를 하다가 순간 갑자기 생각이 멈추었던 순간에, 들숨과 날숨 사이, 음악이나 산책을 하는 동안 새소리를 듣는 등 그리고 쉼과 이완의 시간에도 우리는 항상 그곳으로 되돌아갑니다.
관계에 대한 암묵지는 언어와 관계없이 즉각적이고, 들어오는 무엇이든 받아들입니다.
인생 초기 부모가 우리의 주된 생명줄인 것처럼 그것은 우리 삶의 방향을 결정하고, 심지어 우리가 죽을 때에도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긴밀한 영향을 받습니다.
고타마 붓다는 그것의 결정적인 중요성을 알았기에, 이를 효율적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는 암묵지의 진정한 본질인 ‘연결성’에 마음을 두는 방법과 어두운 곳에 잠겨 있는 암묵지를 끄집어내서 의식화하는 방법을 발견했습니다.
암묵 기억에 저장된 습관적이고 오래된 반응 패턴은 비언어적 인지라는 ‘주시의 빛’ 속에 놓이면 힘을 잃게 된다는 것을 붓다는 알아차렸습니다.
암묵지는 대개 인식되지 않지만 나름의 신경 회로에서 작동하고, 우리의 에너지장 가장 바깥에서 형성됩니다.
깨어있는 마음으로 보면 유쾌하거나 불쾌하거나, 유쾌하지도 불쾌하지도 않은 무감정들마저도, 집착이나 판단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는 이 세계가 마음의 반영임을 이해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고타마붓다는 그 깨어있는 의식으로, 삶과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트라우마를 헤쳐 나가는 열쇠를 발견했습니다.
어찌보면, 그 열쇠는 우리 모두의 마음에 이미 배아 상태로 있다가 우리가 인생 최초로 맺은 관계의 흔적에 몸을 숨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고타마의 '출생 트라우마'와 '출가 이후의 깨달음'은 어찌보면 그런 면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었고, 그도 그것을 재발견하기까지 오랜 기간 힘든 과정을 겪어야 했습니다.
확장된 의미에서 그가 겪은 과정이 우리 모두에게도 예외가 될 순 없다는 점을 비추어 볼 때, 그의 진정한 가르침을 숙고해볼 수 있는 기회는 참 감사한 일입니다.
우리 모두가 스스로 트라우마를 처리하는 수단을 자기 내면에 지니고 있고, 역설적이게도, 그 트라우마를 활용해 훨씬 더 높이 올라설 수 있다라는 사실을 고타마 붓다는 명확하게 보여주었습니다.
고타마 붓다가 말하는 그 관계의 고향은 붓다에게 그랬듯, 우리가 온갖 고난에 처했을 때조차도 늘 거기에서 우리와 함께합니다.
그것은 외부에 어떤 것이나, 생물학적 어머니에게 계속 의존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오직 '내면'에서
발견되는 것입니다.
깨어 있는 현실주의자
고타마 붓다가 살아있던 그 시대는 베다의 일부 경전이나 구전 전통에서 시작된, 힌두교가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점점 더 정교한 이론들과 지적인 토론들로 분열과 갈등이 유행처럼 번져갔습니다.
고타마 붓다는 힌두교의 논쟁, 즉 "신이 있고 영적 영역은 어떠한가"라는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고타마 붓다가 제시한 깨달음의 길과 명상법은, 당시 강력했던 힌두교 전통적 세계관과 인간관, 엄격하고 경직화된 고행과 금욕주의, 새로운 아이디어들에 대해 폐쇄적이었던 브라민들(Brahmins,고고한 지식인들) 등 그 때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볼 때, 매우 급진적인 것이었습니다.
제자를 거닐고 길을 걸어갈 때면 그에게 손가락질 하고 침을 뱉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붓다는 힌두 브라민들과의 전체 논의를 뛰어넘기로 결정했고, 설사 다른 사람의 동의를 얻지 못하더라도 모든 사람에게 유익한 진리를 말하기로 스스로 맹세했습니다.
그는 외적인 마음 너머로 나아가도록, 의식을 높이는 이해를 남겼습니다. 이것은 한편 트라우마로 상처 입은 사람이 받아들일 수 있는 적절한 순간에 진리를 드러내고 그 사람이 자기 문제를 직면하게 했습니다.
트라우마를 견뎌낼 정도의 관계가 형성되었을 때만, 붓다는 그들이 스스로의 내면으로 침잠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심각한 폭행이나 성적 학대의 희생자에게 그 고통은 단순히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많은 트라우마가 가까운 지인이 의도적으로 선택한 행위의 결과물입니다.
붓다는 이런 상황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합니다.
재단은 추후 이런 분노들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룰 수 있을지에 대한 게시글을 추가로 올릴 예정입니다.
환자 가운데 한 명이 자신이 어린 시절 당한 심한 학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저는 그간 사건들에 대해 여러 번 말해왔지만, 그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들었었던 제 감정에 대해서는 결코 말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한들 모든 것이 해소가 되는
건 아니니까요.”
맞습니다. 감정을 이해한다고 해서 그것이 모두 해소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붓다가 말했듯, 감정은 중요합니다.
붓다는 감정에 반드시 끝이 있을 필요는 없다고 했습니다.
감정은 개인적인 차원과 그 차원을 넘어서는 무언가를 연결하는 다리입니다.
분노의 공격성은 억눌리지 않고 안전한 출구를 찾을 때, 즉 인식하고 수용 당하면 어떤 경우 그 소명을 다하기 때문에 자신 스스로를 공격하거나 타인을 파괴할 이유가 없어지고, 창조의 에너지로 전환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알아야 뿌리 깊은 무력감에서 빠져나올 수 있습니다.
그 환자가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 느낀 깊은 실망감에 대해 말할 수 있었을 때 비로소 더욱 깊은 자비심으로 자신의 경험을 대할 수 있었습니다.
트라우마는 환자가 당한 학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폭력과 학대를
해석하는 자신의 감정과 생각에 있었던 것입니다.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하는 만성적인 수치심과 내면화된 자기 공격성의 자리는 이제, 트라우마를 겪은 한 인간을 향한 깊은 애도와 슬픔을 통해 점차 풀려났고, 자신 내면의 모성 에너지를 통해 감정과 관계 맺는 태도와 방식을 바꿈으로써,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활용하여 인생에서 전진할 수 있었습니다.
인간이 자신과 관계 맺는 능력을 회복할 때,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을 일깨울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트라우마는 우리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지만, 더 인간적이고 배려하는 사람으로, 더 현명한 사람으로, 그리고 균형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붓다의 이야기는 잠정적으로 의식성장을 향하고 있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입니다.
붓다의 아버지는 에고를 상징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깨어나지 못한 상태에 있는 동안에는, 에고가 세상의 왕입니다.
어린 고타마가 자랐던 궁전은 에고가 만든 멘탈 박스를 상징합니다.
에고는 우리가 멘탈 박스를 떠나는 것을 원하지 않으며, 이를 보장하기 위해 우리의 삶에 대한 인식을 통제하려 합니다.
에고는 우리가 멘탈 박스의 가치나 그것이 구축된 인식을 의심하게 하는 어떠한 것도 발견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붓다의 이야기는, 잠정적으로 의식 성장의 길에 들어서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입니다.
이 게시글에 열려 있는 사람들은 어쩌면 어린 붓다와 같은 과정을 겪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이 풍족하고 아름답고, 부패와 빈곤이나 죽음을 보는 것에서 차단된 궁전과도 비슷한 현대 사회에서 자랐습니다.
인생의 어떤 시점에서, 우리는 이 궁전 안의 삶, 즉 현대인들의 삶이 우리에게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삶에는 그 이상의 것이 있어야 하고, 우리가 적어도 정신적으로 궁전을 떠나기로 결심하게 될 날이 오게 될 겁니다.
또 한 가지, 이 시대에는 세상을 더 나은 시대를 여는 데 일조하고자 실제로 자신의 심리 안의 장애를 극복하도록, 그것을 촉진하는 힘든 어린 시절을 선택한, 영적으로 더 성숙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개인의 삶과 사회의 모든 측면에서 더 높은 인식을 특징으로 하는 시대로 이동하고 있다는 사실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자신의 인식을 높이고 사회의 특정 영역에서 이를 표현하는 개인들을 통해 주도될 것입니다.
소수지만 언젠가는 이것에 '아하' 경험으로 이어지고 인생 졸업을 향해 굳건히 나아가기로 선택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반대로 이런 언급에 완전히 무관심한 사람들이 훨씬 많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어가고자 하는 말은, 자신이 해결해야 하는 심리적 문제를 살펴보도록 강요되는 상황에 스스로 처하길 원했고, 자신이 그것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과, 그러한 변화를 겪을 때 얻게 되는 인생의 창조적이고 긍정적 단계를 바라보고 그렇게 택했었지만, 태어난 이후에는 그것을 잊어버리게 되므로, 어린 시절의 깊은 상처가 처음에는 매우 가혹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매우 힘들었고 트라우마적이었습니다.
앤코이를 비롯해 이 시대 많은 영성 가르침에서 언급하는 것은, 여러분이 이 생에 경험한 것이 무엇이든간에, 그것은 여러분이 갖고 있는 잠재의식 자아에 있기 때문에,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자아들은 진짜가 아니라, 여러분이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잠재의식적 자아가 여러분에게 투사하는 것은 여러분이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때에 그 일이 일어나지 말았어야 했고, 그것이 문제의 원흉이니 그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문제 하나를 해결하면 또 다른 문제를 가지고 옵니다. 그것을 해결한다 해도, 연관된 주제의 문제를 계속 꺼내옵니다. (안타깝게도, 이것은 평생 지속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쳇바퀴로부터 빠져 나오는 중요한 진전은, 그리고 정체성의 핵심에 대한 가르침이 주는 마법은, '실제 해결해야 할 어떤 문제도 없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잠재의식적 자아의 내부에서 볼 때만 문제이며, 여러분의 순수인식이 잠재의식적 자아 밖으로 나와 외부에서 그 자아를 바라볼 때, 이것은 단지 자아일 뿐이며, 그것은 진정한 나(who I am)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문제를 정의하는 의식(문제에 갇히게 하는 패턴)에서 빠져나올 때, 참 알 수 없게도 문제가 그저 사라져 버리는 희한한 경험을 목격하게 됩니다.
어떻게 그토록 오랫동안 거기에 갇혀 있었는지 스스로도 의아할 정도입니다.
어떤 비난도 필요치 않습니다. 누구라도 같은 상황에서 반응하지 않고 그것을 겪을 수는 없었을 거에요. 즉 잠재의식적 자아를 만드는 것을 피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자신이 만들었지만, 그것이 진정한 자신은 아니기에,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대신, 여러분은 그 자아를 죽게 내버려 두고 자유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허락하지 않는 한, 지상의 어떤 것도 여러분을 소유할 수 없으며, 어떤 것도 여러분을 제한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여러분에게 선택권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붓다 의식과 그리스도 의식
붓다 의식을 가진 이는 번잡한 일상에서 물러나 완전한 평화 안에 있으며, 사람들이 그에게로 오게 합니다.
하지만, 누가 붓다 의식을 가진 이에게 올 수 있나요? 힘겨운 삶의 투쟁에 완전히 갇혀 있지 않은 사람들뿐입니다.
그러므로 삶의 투쟁에 완전히 압도되어 붓다 의식을 가진 이를 찾는 일조차 힘든 사람들이 어떻게 '진정한 자신'에 닿을 수 있겠습니까?
누군가가 그들에게 가서 그 고투를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 의식을 가진 이들의 역할입니다.
신은 붓다 의식을 가진 이를 보내서 스스로 길을 따를 수 있는 사람을 깨우고, 또한 그리스도 의식을 가진 이를 보내서 스스로 길을 따를 수 없는 사람들을 깨웁니다.
붓다 의식을 가진 이는 내면에 집중하여, 마음 그 자체와 이 세상 너머에 있는 영적인 세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의식을 가진 이들은 외면과 내면을 도구로 사용하여, 사람들이 이 세상을 개선하도록 돕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여러분들 중 아주 극히 일부는 붓다 의식의 여정을 가야 할 수도 있고, 만일 그렇다면 먼저, 그리스도 의식의 여정을 따라가면서 이것이 명확해질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아 통달 과정을 시작으로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현실적으로 가능하며, 한 생을 통틀어 스스로를 위하는 가장 최선의 방법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와 붓다 두 여정 모두가 여러분이 근원과 하나됨이라는 같은 지점으로 이어집니다. 실제로 그리스도 의식과 하나가 되는 여정을 시작으로, 진정한 붓다 의식과 하나 되어 붓다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의식과 붓다 의식의 정수는 여러분이 외적인 상황에 대해 지배권을 갖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의 상황과 외부 상황에 대한 자신의 반응에 대해서 지배권을 갖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외부 상황이, 내면의 평화나 자아 통달의 여정에서 자신의 진전을 멈추게 하도록 허용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자신에 대해서 좋게 느끼는 것을 멈추게 하도록 허용하지 않습니다.
마무리 지으며...
만약 여러분이 원하는 어떤 것을 박탈당했다고 생각한다면, 그 결핍된 상태가 정신적 감옥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추후 기회가 더 된다면 앞으로 종교적 의미를 떠나 예수 그리스도나 성모 마리아, 소크라테스, 플라톤, 노자, 마리아 몬테소리 등등... 인간의 정신적 감옥을 탈출해낸, 즉 마침내 이 어렵고도 복잡한 인생 학교를 졸업해낸 '위대한 삶의 본보기'이면서 '진정한 인생 선배들'을 멘토로 우리가 배울 점들을 함께 다뤄보려 합니다.
우상으로 격상되어 도저히 범접할 수 없고 감히 따를 수도 없는 넘사벽이 아닌, 우리 내면의 참나를 통해 가까이에 있고 심지어 '하나'라고 느낄 수도 있는 참 스승으로서 말입니다.
지금까지 바로 그 첫 번째로, 고타마 붓다였습니다.
긴 글 읽어내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참고 출처들:
-트라우마 사용설명서(마크 엡스타인)
-충분히 좋은 엄마(도널드 위니컷)
-몸이 나를 위로한다(남희경)
-https://ascendedmasteranswers.com/
-나무위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