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X) 남성과 여성의 역할에 대한 새로운 관점
앤코이 교육재단 2023-03-21 06:23 851
남성과 여성의 역할에 대한 새로운 관점
우리 사회에 수 천년동안 가부장적인 혹은 남성우월주의 문화 속에 있던 사회에 의해서 규정되어 왔던 어떤 역할들이 있습니다.
한반도를 포함해, 동양권 나라들에서 그것은 현저합니다. 특히 공산 국가와 같은 독재 체제와 중동 국가들에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유럽이나 캐나다에서 좀 덜한 정도이지, 이것은 사실상 세계 도처에 있습니다.
요즘 일어나고 있는 우크라이나 전쟁이 이슈화된 이 시점, 공산 국가에 대해 잠시만 이야기 하겠습니다.
공산 국가들은 특히, 그 체제가 가지는 이중 효과, 체제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자기 중요성의 감각, 즉 체제 안에 없는 사람들보다 자신들이 우월하다는 감각을 구축할 수 있습니다. 그 우월한 체계를 구축함으로써, 다른 인간들을 죽이는 것이 정당화 됩니다.
오랜 기간 공산 체제 안에 있었던 사람들과 대화할 기회가 있었던 사람들 중에 그들이 유독 갇힌 사고 안에 있다고 느낀 적이 있다면 그것에 대한 이유 중 하나일 것입니다.
여기에는 미묘하게 남성과 여성의 성 역할이 왜곡되게 사용되어졌습니다.
남성들은 흔히 자연스럽게 남자다운 요소에 더 끌리며, 이것은 외향적이고 사회나 세상에 영향을 미치는 무언가를 하고 싶고 욕구와 인정받고자 하는 장대한 계획과 관련이 있습니다.
본질적으로 이것에는 잘못된 것은 없지만, 만약 이것이 불균형이 되어 버리면, 남성들은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 할 수 있는 철학이나 아이디어를 채택하게 될 가능성이 여성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습니다.
남성이 서사적 사고 방식에 더 취약하기 때문에 그들은 전쟁에 나가도록 유혹이 될 수 있고, 이 때문에 조작자로서의 일부 강력한 사회 지도자들은 오래전에 남성을 지배적인 성으로 만들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명령에 남성들이 자유롭게 따를 수 있도록, 남성이 일종의 주인이고 여성과 아이들이 노예라는 가족의 이미지를 투사했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자기중심적 의도로 매우 오래 전부터 반복적으로 벌어진 일입니다.
인간을 그저 자신들을 위한 수단으로 보거나, 전쟁이나 분열을 일으키고자 하는 이들은 현재까지도 남성들의 이 우월성에 호소하고 다른 그룹보다 더 잔인하게 여성과 아이들을 억압합니다.
이것은 독재 정부의 잔재이며, 분열이 가진 폭력성입니다만 여전히 우리 사회 곳곳에 존재합니다.
사회와 가정, 그리고 아이들이 폭력적이 되는 것을 균형 잡는 데에는 여성의 역할이 필수적입니다.
하지만 그 여성들 또한 전통적으로 미리 규정된 자신의 역할 안에 심리적으로 갇혀 버리면, 그 역할을 제대로 해낼 수가 없습니다.
남성들 역시 성 역할로 인해 매우 엄격한 제한을 받고 있고, 스스로 진정 행복하지 않음을 알고 있습니다.
인간이 최상의 잠재성과 삶을 축복으로 여길 수 있는 만족에 도달하기 위해, 남성과 여성의 조화는 생각보다 큰 힘을 발휘합니다.
이 게시글은 한 가지 바램을 목적으로 합니다.
여러분들 각자가 삶의 더 높은 목표에 연결되고, 개인적인 성장의 긍정적인 길로 갔으면 하는 것입니다.
이것에는 남성과 여성이 함께 참여하는 것이 포함됩니다.
우리는 먼저 여러분들이 남성들과 여성들이 어떻게 해야만 하고, 어떻게 상호작용 해야만 하는 지에 대한 아주 고정된 시각이 있음을 살펴보길 바랍니다.
그리고 나서 서로 열린 태도로 대화하고, 그럼으로써 남녀가 평등에 기반을 둔 관계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 실제로 어떤 경험인지 직접 경험해 보길 바랍니다.
우리가 어릴 때부터 접해 왔던 영화나 대중 매체, 소꿉놀이 등을 살펴 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많은 해결될 수도 없는 갈등들이 남여간에 만들어져 왔는지 살펴볼 수도 있겠습니다.
여성들을 억압하는 것이 어떻게 제도화되어 왔는지, 심지어 종교 안에서도 그 일들이 벌어졌는지 살펴보세요.
많은 남성들이 유아기부터 여성보다 우월하다는 인식을 전해 받았고, 많은 여성들은 남녀 관계에서 종속적인 위치에 있도록 가르침 받은 적 있습니다.
남녀가 맡는 역할이 따로 정해져 있다고 프로그램 되었다고 표현할 수도 있겠습니다.
또한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 결혼 생활은, 알지 못한 채 들어간 감옥과도 같다는 인식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어떤 가정은 인간적으로 친밀한 관계 없이, 한 집에 따로 사는 두 사람처럼, 각자 역할의 경계를 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기도 합니다.
일부 사람들은 거의 숨도 못 쉴 만큼 엄격하게 정의된 역할에 갇혀 있기도 하구요.
많은 남성들과 여성들이 실로 이로 인해, 그들 사이에 사랑이 자유롭게 흐르지 못하고 있다는 안타까운 현실이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미리 정해진 역할을 넘어서는 데 수치심을 느낀다면, 사랑이 자유롭게 흘러가는 관계를 가질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한 성이 다른 성에 비해 우월하다고 느끼거나, 한 성이 파트너에게 종속적인 위치에 있다고 여긴다면 역시 그렇습니다.
일반적인 문화에서 많은 요소들은 남성과 여성 사이에 보이지 않는 장벽을 세우고 있고, 이것은 남녀 간에 내면의 하나됨을 이룰 수 없게 만들고, 개개인들이 더 큰 잠재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합니다.
한 인간이 자신의 최상의 잠재성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계속되는 성장과 자기 초월의 원천으로서, 개개인 내면의 남성과 여성적 측면, 그리고 자신의 이성 파트너와의 관계적 측면에서 서로 하나가 되는 균형과 조화의 합일이 필요합니다.
모든 사람은 원기 왕성한 양성성을 지닌 존재로, 성별과 상관없이 남성과 여성의 심리적 특성을 둘 다 가지고 있습니다.
융이나 위니컷과 같은 심리 대가들의 이론이 바로 이것에 기반해 있기도 하죠.
하지만 안타깝게도 많은 이들이 그들 자신과 상대 파트너의 한 쪽 특질, 여성성의 특질을 부인하고 왜곡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많은 경우, 인간들끼리 전쟁과 내부 갈등을 일으키기 위해, 일부러 그렇게 유도되기도 했으니까요.
하지만 그것이 비록 사실이라 해도, 그것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갈등의
소용돌이 속에 스스로 휘말린 것은 안타깝게도 인간 자신입니다.
많은 갈등들이 여러분들의 자연스러운 상태를 어지럽히곤 합니다.
우리가 그간 잘 인식하지 못해 왔을 테지만, 이것은 여러분을 균형과
창조성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많은 경우에 그대들을 파괴합니다.
삶을 두근거리는 선물로 만들 것인가 or 지속되는 통제게임으로 만들 것인가
인류의 위대한 관점에서 본다면, 차이가 확실히 창조성과 다양성에 보탬이 됩니다. 사실 힘은 단순 유사성보다는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것에서 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직관을 통해 잘 압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자신과 타인을 부정적으로 깎아내리려는 에고의 경향성 때문에, 사람들은 인종차별, 분리주의, 심한 편견에 사로잡히기 쉽습니다.
사실 우리 사회에 이런 이원성의 줄다리기 영향을 받지 않은 곳이 거의 없고, 남성과 여성의 통제 게임 역시 이런 줄다리기 중의 하나입니다.
어느 한쪽의 변화만이 아닌, 양쪽 모두의 의식적인 변화와 선택이 필요한 부분입니다.
삶을 후회로 얼룩지도록 두거나 혹은 힘겹게 저항하고 통제해야 할 대상으로 살아가거나, 아니면 의식적인 결정을 통해 삶을 두근거리는 선물로 만들지, 여러분의 선택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더 나은 방향으로 집단의식의 물꼬를 틀 수 있을까요?
개개인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정녕 없는 것일까요?
서구와 우리나라에 보이는 무브먼트 불균형의 사례
서구의 많은 나라에서 페미니즘 무브먼트를 통하여 많은 이들이 기본적으로 남성들과 동등한 위치로 자신들을 억지로 강요하길 원합니다.
그들이 남성들보다 더 남성답고, 더 공격적이며, 더 외향적이 되려고 시도하는 많은 여성들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나라 또한 혐오 사이트들이 생기고 그 반대의 극단 XX혐오 사이트들이 생기면서 불균형적인 극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원하는 것은 이런 방향이 아닙니다. 이것은 실상 사회 균형을 이루지 못합니다.
성을 넘어선 보편적인 견해 찾기
우리는 남성과 여성들이 인간에 대한 보편적인 견해를 찾길 바랍니다.
그들 스스로 내면으로 들어가 내면으로부터의 진정한 자존감을 찾길 바랍니다.
열등에 대한 자신들의 희생자 느낌을 보상 받거나, 다른 성별의 에고로부터 자신을 검증 받고자 하지도 않습니다. 열등의 위치에서 큰 소리를 낼 필요가 없습니다. 실제 열등해서가 아니라 주입된 프로그래밍일 뿐이었으니까요.
단지 자신의 성별로 주입된 프로그래밍에 관계없이, 자신이 '그것 이상의 존재'라는 자기 가치와 자존감을 구축함으로써 훨씬 높은 잠재력에 진입할 수 있습니다.
우선적으로 특정 정치적인 변화를 촉진하기 보다는 공개 토론을 촉진하고자 하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무브먼트를 형성하는 것이 효과적일 것입니다.
다시 말해 정치 기관에 가서 변화를 요구하는 대신, 사람들에게 구축된 새로운 인식을 직접 이야기하고, 새로운 이해와 합일을 도출함으로서, 전형적인 여성의 방식(남여 성별과 관계없이)으로 그것에 접근합니다. 만일 국민들 대다수가 마음을 바꾼다면, 지도자들도 그것에 따르게 될 것입니다.
여성을 위해 제안하는 다음 혁명은 '마음의 혁명'입니다.
그것은 '심리적인 혁명'이 될 것입니다.
그들 자신을 성찰하고, 자신의 심리를 개선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지금까지는 많은 여성들이 대중적으로 유용한 정도로, 피상적으로만 취해 왔던 경향이 좀 있었습니다.
배경을 깊이 살펴 보지 않은 채, 요가나 마음챙김 수련을 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나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는 보다 더 높고 더 깊은 접근법을 찾게 될 것이며, 보다 많은 것들이 개방될 것이고, 이후에는 붙여진 이름과 상관없이, 영적인 성장을 추구하기 시작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성별을 떠나, 시민들과 그들의 어린 아이들을 진정 도울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는, 그들의 고유한 창조성과 잠재력을 개발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어떤 잠재력을 갖고 있는 지에 대한 보편적인 견해를 주는 이론을 제시하는 것이 꽤 가능합니다.
우리의 잠재력을 깨닫지 못하게 하는 인간의 심리 요인들을 이해하는 것이 그 중 한 가지입니다.
각 나라를 위한 새로운 아이디어들을 사람들이 내놓을 수 있도록 그들의 창의성을 발전시키고 격려하기 위한 방안들이 필요합니다.
창의성은 내면에서만 나오고, 자신의 내면에 무엇이 있는지 모른다면, 어떻게 그것에 진정으로 연결되어 건설적인 방향으로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을까요?
현대 민주주의 국가들은 물질적 복지에 지나치게 초점을 맞추는 대신, 심리적이고 영적인 복지(psycho-spiritual welfare)에 초점을 맞추도록 전환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인류가 행복해지고, 충만해지며, 실제 삶이 사람들을 어떤 곳으로 나아가게 하는 과정임을 보게 되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전통적인 성 이미지와 성 역할을 초월하길 바랍니다.
많은 경우, 여성들이 긍정적인 의미에서 때때로 엄격하고 직설적일 수도 있고, 남성들 또한 부드럽고 애정이 넘치며 친절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의식을 성장시키며 점차 이렇게 말하게 됩니다.
"그것이 무슨 상관인가요. 성별이 왜 내 삶의 성장이나 진정한 내 존재의 표현을 제한해야 할까요? 내가 남성의 몸으로 있든, 여성의 몸으로 있든, 그와 상관없이 나는 내가 되고자 하는 더 나은 존재가 될 것이고,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그 이상으로 자신을 표현할 것입니다."
여성들이 상호 관계에서 시중드는 역할에 한정되지 않고 훨씬 더 창조적으로 될 수 있는 가능성들을 펼쳐 나가길 바랍니다.
남성들 또한 전통적인 남성 역할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더 큰 성취감을 추구하고, 관계에서부터 오는 충족감을 느끼는, 그리하여 깊은 심리에서부터 웰빙과 만족감을 느끼는 삶으로 이어지길 바랍니다.
기성세대와의 소통
젊은이들이 기성세대에게 위협을 주지 않으면서도 소통할 방법을 찾고, 그들이 가진 새로운 견해와 방식에 대해 자유롭게 말하고, 자신이 더 낫다고 느끼는 방식으로 관계를 맺으며 삶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성 세대를 비난하는 대신, 단지 과거의 낡은 방식이 자신들에게 더 이상 적합하지 않음을 설득할 수 있습니다.
체계를 유지하는 일이 사람들의 행복과 안녕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교묘한 인식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국가의 진정한 목적은, 국민들의 정신적, 영적 행복을 증진하고, 그들에게 천부적인 창조성을 발휘할 최고의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국민들 대부분이 일상생활에서 좌절감과 불만족을 느끼는 국가에서 최상의 잠재력이 성취될 수는 없습니다.
오직 개인적 관계에서 사랑이 자유롭게 흐를 때,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창조력이 발휘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남성과 여성이 특정한 역할에 갇혀 있다면, 그들 사이에 사랑이 자유롭게 흐르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앞으로 많은 공개 토론의 장이 필요하고, 이들이 균형을 잃거나 급진적인 극단주의에 치우치지 않고도 담대하고 자유롭게 토론을 이끌어가길 바랍니다.
이것은 법을 새로 제정하는 문제가 아니라, 그동안 금기시된 주제에 대해 자유롭고 성숙된 토론의 장을 열어주는 문제입니다.
금기시 되는 주제들
많은 사회에서,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언급을 금기시 하는 주제 중 하나는 성(性)입니다.
하지만 성은 반드시 필요한 대화의 주제 중 하나이고, 그간 인식되어 온 것들과는 다르게, 우리가 전통적인 역할관에 규정되어 온 많은 것들은, 실상 남녀 모두 성적인 관계에서 충족되지 않는 상황에 가두어 둔 것이 원인이 된 바 있습니다.
남녀 관계에서 최상의 잠재력은, 어떤 면에서는 서로 하나됨을 이룸으로써, 사랑의 관계가 영적인 성장으로까지 이어지는 것일 수 있습니다.
성에 대해, 어떻게 남여가 새로운 방식으로 관계를 맺을 수 있을지에 대해 자유로운 토론이 없다면, 어떻게 사람들이 전통적인 역할을 넘어설 수 있을까요?
사람들이 현재 어떻게 성을 경험하고 있고, 왜 충족되지 않는다고 느끼며, 관계에서 어떤 변화를 원하는지 표현하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다소 불편함을 느끼더라도, 이런 단계를 거칠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오래된 제도 하에서는 일단 결혼을 하면 평생 그 결혼을 유지해야 한다는 전통적인 역할이 있습니다.
남성에게 학대 받고 의지할 곳 없는 여성들의 경우, 관련하여 비싼 희생을 치르게 만든다는 사실을 우리 사회는 아직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가정 안에서 남성은 자신이 만족하지 못하는 모든 책임을 여성에게 전가하곤 합니다.
조금 뼛골 때리는 말씀이 될 수 있겠지만, 남편이 아내에게 폭언, 특히나 신체적인 학대가 동반되는 경우, 이것은 반드시 부인의 잘못이 아니라 남편에게 정신적인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학대는 좌절감에서 비롯되고, 좌절감은 자신이 어떤 상황에 갇혀 벗어날 수 없다는 느낌에서 옵니다.
많은 사람에게 있어 최대한의 성장을 위해서, 삶에서 한 번 이상의 남녀 관계를 가질 필요도 있는 것입니다.
한국인들이 더 나은 열린 방식으로 가족 관계에 접근하여, 수십 년 전 전통적인 가족 구조가 무너졌던 나라에서 겪었던 오류를 되풀이하지 않게 되길 바랍니다.
오래된 금기를 돌파하기 위해서는 종종 격렬한 논쟁이 수반되는 격동의 시기를 거쳐야 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토론함에 있어 더 성숙하고 균형 있는 방식을 찾게 되길 바랍니다.
진정한 사랑은 통제와 함께 양립할 수 없습니다.
사랑 같은 뭔가를 지속하는 유일한 방법이 그 누군가를(혹은 무언가를) 현재 외적인 형태 안에 유지하는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도록 여러분들 마음은 흔히 조건화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생각하기를 사랑은 특정 조건화된 어떤 형태를 띄고 있다고 믿고 있고, 자신이 특별하다 느끼는 누군가와 오랫 동안 함께한다는 느낌을 그 형태 안에서 유지하기 위해, 그 어떤 상태 안에 어떤 형태를 유지하여 상대방을 자신에게 계속 묶어두길 원하고, 이것은 상대방을 통제하는 모드 안에 놓이게 합니다.
하지만 실상 진정한 사랑은 통제와 함께 양립할 수 없습니다.
한쪽 혹은 양쪽 파트너들이 통제 게임을 하고 있을 때 그 사랑은 결코 지속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흔히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의 실상을 잘 살펴볼 때, 그것이 사실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 많은 경우 소유욕, 열망이었음을 보게 될지도 모릅니다.
때문에 아주 많은 사람들이 서로 이끌림을 느껴 사귀기 시작했고, 사랑 속에 있다고 말하곤 하지만, 허니문이 끝났을 때, 이후 그 사랑이 식어 버렸다 느끼거나 통제 게임으로 대체되는 것을 경험하고 있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아주 많은 경우에 각 개인은 진정한 사랑이 기꺼이 흐르도록 허용하는 대신에, 상대방을 통제하려고 모색하고 있습니다.
많은 파트너들이 이를 보려 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겉으로 봐서는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듯 보이는 부부조차도, 그들은 자신들이 하고 있는 통제 게임에 둘 다 만족하기 때문에 그 관계를 4-50년간 유지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렇게 보내는 동안 그들은 과연 성장했나요?
오늘날 특히 이혼률이 더 높아진 것은 이제 사람들이 이 통제 게임 속에 갇혀서 한 평생을 머무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끊임없는 분투로 갈등이 너무 심해지고, 그들 내면의 여성과 남성 측면의 균형이 잡을 수 없어서, 그들은 같은 가정 안에서 함께 살기 위한 자신의 능력을 유지할 수 없는 지점에 다다릅니다.
이제 더 나은 곳으로 움직일 필요가 있을 수 있고, 실상 그 통제 게임을 초월할 필요성을 자각할 때인 것입니다.
인생은 내면의 성장을 위한 학교라고 말씀드렸었습니다.
이 '인생 교실'에서는 결코 '완벽한 관계'란 없습니다. ^^
오직 배움과 성장, 자기초월의 과정인 것입니다.
그것을 계속 보려 하지 않는다면 참으로 안타깝지만, 이후 더 오랜 기간 계속해서 그 통제 게임과 함께, 그것을 갖고 있는 사람들, 직장 동료든, 친구이든 간에, 그들을 함께 끌어들이는 것을 목격하게 되실 겁니다.
자유롭게 되는 유일한 길은, '그대가 이제껏 볼 수 없었던 자신 내면의 그 무언가를 정직하게 살펴 보겠다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신앙을 가진 누군가는, 관련해서 '더 나은 이해'와 '조건 없는 사랑'을 경험하게 해달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집단 의식으로 흐르는 아주 단순하고도 흔한 심리 메카니즘이 있는데, 자신이 사랑 받을 가치가 없다고 느끼는 심리입니다.
자신이 '사랑 받기 위한 가치'에 그간 어떠한 조건들을 믿어왔는지, 이것을 기꺼이 보려 하지 않는다면, 그대는 진정한 사랑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통제 게임을 인정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일까요?
모든 사람들이 각각의 통제 게임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실제 여러분이 아니며, 여러분이 누군인지(who you are)에 대한 것도 아닙니다.
그대가 자신이 에고보다 더 이상의 존재임을 깨닫고, 통제 게임들을 능가할 가능성에 깨일 때, 그대는 그간 떠맡았던 짐, 어떤 관계 패턴들로부터 벗어나 더 나은 곳으로 움직이게 될 것이고, 그것으로 다른 많은 이들에게 그것을 넘어설 필요성과 가능성을 본보기 보였다면, 그것이 과연 부끄러운 일인가요?
참고: 삶을 경험하는 방식을 전환하기 위한 이해 :에고
여러분 중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음, 통제 게임을 초월해야 한다는 건 알겠어요. 그러나 어떻게 지속적으로 그것을 초월하고 더 나은 비전을 구체화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말입니까?"
여러분들이 아직 '연결성'을 회복하지 못했을 때, 그것이 너무나 어려워 보이는 도전이라는 것을 우리도 압니다.
여러분이 고유한 진정한 자기 가치를 깨닫고 진정한 휴머니즘에 닿을 때, 자신 내면에서 통제 게임에 머물도록 감정 에너지들을 끝임 없이 소비하게 하는 블랙홀을 만드는 믿음들을 해결할 힘이 그대 안에 이미 주어져 있다는 것을 내면에서 경험하고 알게 됩니다.
다른 게시글에서 우리는, 현재 서구의 많은 나라들이 전통적인 그리스도교와 과학적인 물질주의에 의해 제시된 수수께끼를 해결하지 못해 마비되어 있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그 수수께끼의 핵심은 여러분들이 스스로를 어떤 존재로 정의하는가 하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태어나서 접하게 된 미리 규정된 성 역할이 무엇이든 간에, 여러분이 스스로 정의하는 것에 의해서, 지속적으로 제한 받을 수도 있고, 혹은 그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도 있다는 의미입니다.
삶에 대한 보편적인 접근 방식으로, 관련된 주제에 대해 좀 더 나은 대안을 마련하는 것이 꽤나 가능합니다.
우리 사회에는 다양한 방식으로 창의성을 나타낼 수 있는 이들이 존재하기 때문이죠.
그들로부터 나오는 아이디어들이 우리가 어떤 부류의 존재들이고, 삶에서 어떤 종류의 목적을 갖고 있는지 살펴보기 위한 새로운 방식을 실제적으로 구축하고 발전시키는데 돕게 될 것입니다.
이 목적의 일부분은, 우리가 실제로 자기 인식(self-awareness)을 가진 존재이며, 그렇기에 우리는 정상적이라 규정된 일상의 자아 밖으로 나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전보다 더 성장하고 발전된 존재가 되어가도록 변화하고, 개선되고, 더 나은 자신, 더 나은 우리가 될 수 있도록 의식적으로 결정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러분들이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 부디 깨닫기를 바랍니다.
삶은 후회스럽거나 저항해야 하는 어떤 것이 아닙니다. 삶은 아무 생각 없이 살아야 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삶은 선물입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이미지출처: 구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