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XI)끌어내는 교육, 직관의 힘 (신청서 1-② 질문의 참고)
앤코이 교육재단 2024-03-04 14:26 603
살아갈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신청서 1-② 질문의 참고)
근대 교육의 시작 이래 오랫동안 학력과 스펙이 성공과 연결된다는 믿음은 오랫동안 의심받지 않았습니다만, 이제 그 믿음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사회 분위기가 점점 바뀌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한 부모들이 계속 늘고 있고, 자녀들의 성공 지향 욕구도 약해졌습니다.
사람의 학력과 스펙만으론 행복한 삶으로 귀결되지 않는다는 삶의 본질이 드러나고 있는 것일까요.
과거에는 기업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해도 졸업장이 명목상의 직함을 주고 정년까지 보장해 주던 시기가 있었습니다만, 저성장 기조가 고착화되고 있는 '뉴 노멀(new-normal)'시대에는 갑자기 정리해고를 당하는 일도 비일비재합니다. 학력과 스펙이 위기 상황에서는 별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동아시아의 교육은 많은 부분에서 공통점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압축적 근대화, 성적 중심의 경쟁 교육, 지식 전달 중심의 수업, 관료주의적 통제 등을 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최선을 다해 거쳐왔다고 볼 수 있는 대한민국은 현재 안타깝게도, 등교 거부 학생과 은둔형 외톨이들이 늘고 있으며, 자살자수도 급증하는 상황입니다.
사회는 과거에 비해 매우 풍요로워졌고 사회적 시스템은 많은 발전을 이루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살아갈 힘과 의욕은 약해지고 있는 측면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살아갈 힘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자기실현'을 향해 나아가는 힘이며, 다른 게시글에서 언급했던 '창조의 더 높은 단계로 이동하는 힘'입니다. 자신을 긍정하는 힘과 능력을 키움과 동시에 그것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고, 사회 속에서 의미 있는 활동을 하여 인생을 즐기며 자신의 위치와 균형감을 조화롭게 획득해 가는 힘입니다.
이것에 대한 이해에 기반해, 우리는 교육의 진정한 본질과 목적에 대한 보다 넓은 관점으로 나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변화에 신속히 대응할 수 없는 기존 체제, 성장을 저해하는 전통적인 가치관이나 인습, 편견, 미신, 경쟁 중심, 투쟁과 도피 반응 등에서 해방되는 방향성을, 교육적 측면에서도 사회가 함께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입시 경쟁에 기반한 사회 시스템에서의 교육이 개성과 창의성을 중시할 수 없다는 것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습니다.
전통적인 교육에서는 주어진 틀과 조건을 넘어서는 성장을 제공하지 않았고, 창의력을 발휘하고 표현하고자 하는 개인들은 자칫 공동체에서 소외 받는 존재가 되기도 했습니다.
공부란 남들과 경쟁해서 이기고, 그럼으로써 자기가 속한 가정이나 집단의 우월함을 입증하고, 출세하기 위한 수단이 되어버리는 것, 교육이 이러한 외재적 목적을 위한 수단에 치중할 수록, 관심은 교육의 진정한 본질이 아닌 다른 곳으로 옮겨가게 됩니다.
때문에 교육 정책과 제도를 바꾼다 해도, 상위권 집단에 소속되고 싶어하는 입시 경쟁 위주의 '의식'이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는 한, 사교육 열풍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사교육 시장은 주변 사람들의 시선과 평가에 예민한 부분 즉, 자기 아이가 남들보다 뒤떨어지거나 평균에 미치지 못하는 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기 때문에, 학부모들의 이런 심리를 이용해 마케팅에 활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끌어내는 교육
학생들의 주관적 행복지수와 삶의 질을 비교한 연구 결과에서, (노르웨이, 폴란드, 독일, 영국, 이스라엘, 루마니아, 폴란드, 스페인, 콜롬비아, 터키, 에티오피아, 네팔, 에스토니아, 남아프리카공화국이 포함된 15개 국가 중) 한국은 모든 척도에서 낮은 주관적 행복지수를 보였습니다.
주관적 행복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요인으로 '자기 자신에 대한 만족'과 '선택의 자유' 항목에서 특히 낮았습니다.
학생들이 자살충동을 느끼는 퍼센트와 삶의 만족도 조사 결과까지 감안할 때, 전문가들은 과도한 학업부담과 이로 인한 자율적 결정권의 부족을 원인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교육의 큰 가치가 인간성 회복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육이 인간을 인간답게, 인간인 것 자체로 행복하도록 이끌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따라서 자녀들이 행복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는가'와 '자신의 삶에 어떠한 선택을 할 수 있는가'에 보다 많은 관심을 쏟을 필요가 있다고 많은 연구자들은 조언합니다.
개개인은 의지력, 자기를 긍정하는 마음, 결단력, 감성 즉, 인간으로서의 저력에 해당하는 '살아갈 힘'의 발달 기회를, 대뇌 신피질이 담당하는 능력의 발달보다 우선적으로 제공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문자와 계산 즉, 성급하게 필기시험에 유리한 논리조작만을 앞세워 발달시키는 것은, 토대 없이 집을 지으려는 것과 마찬가지 아닐까요.
가장 중요한 살아갈 힘을 고려하지 않은 채 이루어지는 표면적인 논의는 사회 구성원들의 행복으로 연결되지 않습니다.
학생들에게 단순 암기보다 본질적인 인간성을 향상시키고 '의식'의 가치를 아는 힘, 그리고 자율적이고 주도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을 길러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리고 지식과 틀을 외부에서 강제하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이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는 내면의 힘을 끌어내는 것을 교육과 취지의 기본으로 삼았으면 합니다.
이것이 바로 '끌어내는 교육'이며, 인간주의 교육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이 교육관에는 학생들은 원래 모든 것에 흥미를 보이기 때문에, 강요하지 않아도 지식을 흡수하려고 한다는 점과 스스로 건전하게 성장하고자 하는 힘을 내면에 간직하고 있다는 인식, 인간에 대한 존귀함을 먼저 일깨우는 인식이 들어 있습니다.
알렉산더 수더랜드 닐은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아이들은 자신 안에 신(神)을 가지고 있다. 자아가 충족된 자유로운 아이들은 그 신을 발휘한다. 선악이나 옳고 그름의 가치 기준을 두어 아이들을 틀에 맞추려고 하면 그들 안에 있는 신이 악마로 바뀐다. 즉, 법률과 규칙으로 얽매고 도덕으로 억누르려 하기 때문에 반역자가 생기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자신 안에 신을 품고 있지만, 보통의 경우 그 신은 잠들어 있다고 합니다. 비록 외부에서 보이지 않더라도, 그 신의 존재를 인정하여 일깨우는 것이, 끌어내는 교육의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창조적 흐름을 차단하는 '조건' 넘어서기
모든 문제는 사실 사람들 내면의 그 '의식'(awareness)이란 천재성, 창조적 흐름을 차단함으로써 만들어집니다.
억압과 조건에 의한 '반-사랑'은 페르소나를 상대적으로 강화한다는 면에서 인간의 더 위대한 측면을 축소시키고, 따라서 이면적인 어둠 역시도 깊어진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갇혀 있다고 볼 수도 있는 '투쟁-도피 반응'은 해결책이 될 수 없습니다. 주어진 조건들에 적응하여 최소한의 마찰과 노력으로 인위적인 평화만을 바라는 것 역시도 훌륭한 대안이 아닙니다.
직관의 시대
변화와 혁신을 불러오는 인간의 숨겨진 힘임이 알려지면서, 직관은 IT시대에 더욱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직관은 발명품, 과학, 수학, 예술, 정치, 사업, 교육, 문화, 영성을 비롯해서 삶의 거의 모든 분야에 필요하고, 이제 사람들은 직관을 기반으로 한 창의적인 접근을 그 어느 때보다 더 원하게 되었습니다.
직관은 불확실성을 극복하고 상상력과 연결되어 새로운 아이디어를 도출하고, 혁신적인 변화를 이끌어내는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회는 점점 급격히 변화하고 있고, 지속적인 도전에 대처가 필요합니다. 불확실성이 높은 복잡한 문제들에 직면하면서, 전통적인 분석적 접근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사실을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알아차리고 있습니다. 또한 기존의 물리적·정신적 관념들이 더 이상 충분히 포괄적이지 못하다는 사실을 직면하고 있습니다. 기존의 방식과 접근법만으로는 새로운 해결책을 찾기 어렵고, 더구나 윤리적인 고려가 더욱 중요해졌습니다. 이제 새로운 현실에 맞는 새로운 방법들, 좀 더 크고 포괄적인 맥락 안에서의 통합이 필요해진, 직관의 시대가 도래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알고 있다시피, 뇌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죠. 맨 아래에 있는 뇌간(파충류 뇌)은 우리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 반사 반응, 본능을 컨트롤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 위에 있는 변연계(감정의 뇌) 부분은 우리의 감정, 정서, 충동, 강박, 감정적 반응을 컨트롤합니다. 가장 발달한 신피질(인간의 뇌)이 이성과 직관을 담당합니다.
뇌간과 변연계에서 일어나는 본능적인 반사 반응과 충동적 행동은 우리 몸과 자아의 생존을 보장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오직 감정만으로 더 높은 진실을 알아차리고 성장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종종 낮은 차원의 감정과 높은 차원의 직관을 혼동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직관의 한 조각으로서, 직감이 있죠. 흔히 직감을 '오감(시· 청· 후· 촉· 미각 )이외의 감각'이라 분류하며 '육감'이라 칭합니다. 동물도 주변의 소리나 냄새의 변화 등 위험을 감지한다는 면에서 직감을 가지고 생존에 반응하지만, 직관은 인간만이 가진 고유한 능력입니다. (직관을 제 7의 감각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인간에게 직관은 창의성과 영감의 원천으로서, 에너지의 인식, 내면의 지혜, 그리고 높은 의식과의 연결을 통해 나타나는 영성의 일종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이성과 직관의 적절한 균형을 통해 알아차리고 성장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졌습니다.
그러므로 '동물적인' 감정 혹은 직감과 '인간이 지닌 직관'을 서로 헷갈리지 않도록 주의하세요.
동전의 양면처럼 의식과 에너지는 하나입니다. 이 두 가지가 즉각적으로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사실을 기억하세요. 그대의 주파수, 즉 의식-에너지 수준이 인식에도 영향을 미쳐, 앎의 내용을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주파수가 상승할 수록, 그대는 자신과 현실, 그리고 삶의 원동력을 한층 다각도로 인식하게 됩니다. 반대로 주파수가 낮다면, 그대는 자신을 유전자의 명령대로 만들어진 두뇌의 통제를 받는 육체로만 인식할 것입니다.
내 영적 수준은 어떤 단계일까?
의식성장의 성숙단계는 학교 교육 과정과 비교해볼 수 있습니다.
먼저 우리는 유치원, 초등학교에 가서 읽고 쓰고 간단한 계산법을 배웁니다. 그 다음 단계의 학교에서는 초등학교에서 쌓은 기초지식 위에 새로운 지식들을 쌓아나갑니다.
학년이 올라갈 수록 배우는 내용은 점점 더 어려워집니다. 예를 들어 외국어, 수학, 화학, 물리 등을 배우게 됩니다.
인생이라는 학교도 이와 비슷합니다.
더 많이 배우고 더 많은 것을 경험할 수록, 우리에게 주어지는 의식 성장의 과제도 점점 더 복합적이고 미묘해질 수 있습니다. 자연의 법칙은 쌓은 이해와 경험을 충분히 활용하라고 어떤 측면에서는 더 어렵고 성숙된 과제를 제시하곤 합니다. 인생 학교의 교사 일부는 자연의 법칙입니다. 학생들 각자의 단계와 수준에 맞는 연극을 보여주고 저마다 다른 과제를 내줍니다.
그러므로 쉽고 평탄해 보이는 인생을 가진 이들을 단순히 부러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인디언 한 속담에서 말하듯, 우리는 사실 상대방의 목화신을 신어보기 전에는 상대방을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보다 주목하고 감사해야 할 것은, 자연의 법칙이 우리가 풀 수 없는 과제를 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교육수준이 다르듯, 영적인 의식 수준도 저마다 다르죠.
영적 수준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지식수준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농부나 콜센터 직원이 교수나 학자보다 영적으로 더 발달하고 더 뛰어난 직관을 지닌 경우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지식의 양이 직관적 지능의 잣대는 아닌 것입니다.
사랑에 재연결하세요.
사람들은 흔히 '왜 이런 일들이 나에게 일어났을까' 혹은 '왜 신은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도록 허용하는 것일까'라고 의문을 가지기도 합니다.
이것에 대한 한 가지 측면은, 사람들이 잠재의식을 포함해 특정 의식상태에 무한정 계속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본인들이 이제 변화하고 이동할 때임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경우가 참으로 많습니다. 자신이 계속 보지 못하고 포기하지 못한 환상이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보다 확장된 의식을 필요로 하는 것이지, 단순한 징벌의 개념이 아니랍니다.
한 편에서 그런 이들을 실제 도울 수 있는 것은, 멍에를 던져 버릴 수 있을 만큼 충분하고도 오랫동안 제약을 받아왔던 한 사람이, 더 높은 의식으로 올라서기까지 그 제약들을 어떻게 버텼고, 그 제약들 위로 어떻게 올라섰는지에 대한 하나의 예증, 본보기를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약과 멍에들 위로 올라서는 법을 예증하기 위해, 훨씬 더 괜찮은 상황에서 지속할 수도 있었던 성장의 기쁨을 제쳐두고, 오랜 시간 대중들의 제약을 떠맡아왔던(여러분의 멍에를 함께 지고 걸어온), 영적으로 성숙한 이들이 있습니다.
또한 집단의식을 높은 수준으로 전환하는 것을 돕기 위해 종교, 직업, 성별, 나이, 국적을 떠나 실로 많은 이들이 여러 방면에서 함께하고 있고, 여러분들을 돕고 있습니다.
이것을 하고 있는 이유는 단 하나, '사랑' 때문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보아왔던 그 어떤 것도 초월한 사랑이랍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가치가 없다고, 자신을 사랑할 수 없다고 믿게끔 내버려 두지 마세요. 여러분들은 매순간 깊이 사랑받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스스로 그 사랑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느끼는 것보다 더 여러분 스스로를 제한하도록 막는 것은 없습니다. 스스로 결함이 있다고 받아들이길 바라는 것은 오직 에고뿐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에 재연결하세요.
사람들을 심리적 제약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것은 재단 구성원들의 커다란 기쁨입니다. 이원성을 초월한 사랑이 어떤 제약도 정복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가 이미 경험으로 증명한 바 있고, 여러분 또한 그러한 예증을 남길 수 있습니다.
진정한 여러분 자신이 무한한 존재이고, 삶의 어떤 형태 속에 갇히거나 손상받을 수 없다는 그 실체에 재연결할 때, 여러분도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심리학자 융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것은 지구상의 모든 힘을 모은 것보다 몇 배는 더 강한, 진정한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