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XII) 창조의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가기 (신청서 1-②참고)
앤코이 교육재단 2024-03-06 14:49 624
비의지와 비존재를 인식하고 초월하기(신청서 1-② 참고)
비의지와 비존재는 현재 인류의 수많은 개개인들이 가지고 있는 '살아갈 가치가 없다'라는 느낌과 연관된 핵심 주제이지만, 사회가 그간 잘 인식하지 못했던 요소입니다. 이것을 제대로 의식(awareness)할 수만 있다면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해방이, 또 누군가에게는 양자도약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의식 성장에 대해 처음 접하시는 분께서는 글을 완전히 이해하는데 충분한 시간이 필요할 수도 있다는 점을 미리 밝혀둡니다. 아래 게시글을 먼저 읽고 오신다면 이해에 많은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글이 다소 길게 느껴지신다면 짤막하게 끊어서 읽으시는 것도 방법이겠습니다.
정말 많은 신청자분들께서 감사하게도, 진정한 자신을 표현하려는 '의지'를 발휘해 주셨고, 실제 몇몇 선발자분들께서는 '존재'의 이해와 관련해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꽤 깊이 있는 고민을 재단에 전해 주신 바 있었습니다. 그 고민들은 의식 성장에 대해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숙고해 보았을 때, 비로소 개인의 체험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만큼의 가치가 있다 여겨지고, 여러분으로부터 더 높은 이해의 갈망이 있음을 발견하고 참으로 기뻤습니다.
이 게시글은 그런 여러분들께 사랑과 섬김으로 드리는 답변인 셈입니다.
첫 번째 이해: 비-의지와 비-존재(Non-will and non-being)
그대는 혹시 죄 없는 사람들, 혹은 자신에게 소중한 어떤 사람(들)이(또는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 의해 폭력적으로 억압당하는 것을(물리적 억압 뿐 아니라 감정적·정신적으로) 목격하신 적이 있나요?
긍정적인 변화를 일으키려는 시도로서 자신의 창조성이 억압되거나, 원치 않거나 무시당했던 경험은요?
사람들을 억압하는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해 준 것은 많은 경우, 사회의 기준입니다. 우리 사회 기준들 중 이원적으로 왜곡되어 편향되고 강요되고 있는 측면을 한번 들여다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원적 기준이란 옳은 것과 그른 것, 즉 성공과 실패를 의미합니다. 이 기준은 "완벽"과 "실패"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경우 그 기준에 따라 옳지 못한 것, 틀린 것 또는 실패한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만약 이러한 외적 기준을 창조적 노력을 비롯한 삶의 모든 측면에 이분법적으로 적용해 버리면, 사람들은 진정한 만족을 포함해, 본래 가진 특성들과 멀어지게 됩니다.
사람은 본래 자발성과 자율성을 가지고 자신의 행동이 스스로에게서 나온 것이라고 느낄 때, 더욱 열심히 하고 만족하는 편입니다. 이에 반면, 완벽과 실패의 이분법적 사고는 고정된 마인드셋을 유발하여 삶에 대한 부정적 감정을 유발시키고, 만족에 대한 즐거움을 상실하게 합니다. 자신의 가치를 외부에 의존하게 되고, 창의력을 발휘하기 보단 삶의 과정을 신뢰하지 못하게 됩니다.
질서와 자유의 균형을 맞춘다는 의미에서 건설적으로 사용되는 측면들과는 다르게, 이원적이면서도 외적인 측면의 조건과 기준들이 있습니다. 그 이원적 기준들은 사실상 삶의 모든 측면에서 볼 수 있고, 사람들의 창조성을 공격적이고 강압적으로 차단하는데 효과적인 도구가 되어 왔습니다.
다른 게시글에서 언급 드린 것처럼, '사람이 지닌 자각과 창조성이 자신에게 위협이 된다'고 여기는 인간 에고와 타락한 의식으로 인해, 그리고 사람을 온전한 개인으로 인정하지 않는 사회 측면으로 인해, 이런 현상은 아주 오랜 세월 이어져 왔습니다. 사람들이 인식하지 못하는 보다 근본적이고 깊은 부분이 있고, 이것에 영향 받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이것을 제대로 알아차리는 사람은 아직 많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알아차리는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 세상은 건설적으로 계속해서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간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제대로 들여다 보려 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어떤 냉혹한 상황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무력감이 사실상 굉장한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카르마에 대한 보다 정확한 이해를 비롯해, 제대로 된 영적 이해력 없이 자란 이들에게, 이러한 것들은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인식조차 하기 어려운 부분이기도 합니다. 뇌의 일부가 정지되는 잠재의식적 과정을 순간 겪게 될 수도 있고, 그것을 못본 척 하거나 억압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억압은 현상유지의 가장 강력한 도구라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사회의 조건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비-의지에 갇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그저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고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할 뿐입니다. 다음과 같이 말할 의지가 없습니다. "아니요, 제 생각에 이건 옳지 않아요. 저는 여기에 참여할 의향이 없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을 비난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집단의식의 한 측면을 들여다 보자는 겁니다.
사람들은 주인의식과 책임의식을 요구받곤 하지만, 막상 주도적으로 행동하면 가만 놔두지 않는 상황이 도처에서 벌어집니다. 도전과 혁신을 수없이 강조하면서, 한편으로는 도전에 따른 실패에 대해 징계를 가하거나 과도한 감사를 시행하고, 까다롭게 통제합니다. 윗 선에서 강압적이고 암묵적인 지시가 내려오기도 합니다. 사실상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이중 메시지가 주어지고, 정신적 면역력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자기 신뢰를 잃어버리는 셈입니다.
비존재는 비의지에 비해 훨씬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입니다.
비존재를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존재'라는 개념을 언급하겠습니다. '존재'란 어떤 측면에서, '의식 성장의 끊임없는 흐름', 즉 의식 성장에 대한 지속적인 자기 초월을 의미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아래에서 더 언급드릴 테니 일단 따라와 주세요.) 자, 이것이 비존재와는 어떻게 다른 것일까요?
'집단의식'의 일부로서 비존재를 언급해 보려 합니다. 비존재는 집단 의식에서 오랜 세월에 걸쳐 생성된 자아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한국인들에게 특히 많다는 '한(恨)', '화병', 그리고 '살아갈 가치가 없다'(자살 충동)는 감정과도 직접적으로 결부되어 있습니다. 과거보다 드러나고 개선되고 있는 측면이 있지만 여전히 거대한 힘으로 집단 의식에 작용하고 있고, 대중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집단의식으로 인해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사회는 이것을 등한시 할 수 없습니다.
비존재는 사람들을 집단적인 기준에 따르도록 아래로 끌어 당깁니다. 여러분들 중에 어떤 원치 않는 기준을 따라야만 하는데 있어, 혹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에서 뭔가 구속받는 느낌, 무력함에 가라앉는 느낌, 자신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거나 장점을 발휘하지 못하고 에너지가 축 쳐지는 경험들을 해 보신 분들이 있으실 겁니다.
비-존재에 관해 무시해서는 안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무의식 깊숙이 있지만 흔히 제대로 다뤄본 적이 없는 측면인데, 지속적인 자기 초월에 대한 포기 혹은 거부의 측면입니다.
이것은 삶에 대한 완전한 안전감을 확보하려는 욕구에 의해, 또는 전반적으로 매우 지치고 공허함이나 결핍감을 느낀 나머지, '어떤 변하지 않는 궁극적인 상태에 도달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드러나기도 합니다.
누군가에게는 죽음으로서 되찾을 거라 생각하는 영원한 고요, 또는 영원한 쉼일 수도 있고 어떤 궁극적인 성취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게시글에서 '분리된 자아'가 쌍으로 존재함을 다룬 적이 있습니다. 과거에 일어난 일을 항상 후회하는 분리된 자아가 있을 수 있고, 항상 미래에 더 나은 것을 기대하거나 불안과 두려움으로 미래를 바라보는 분리된 자아가 있을 수 있습니다. (분리된 자아의 한 가지 측면을 들여다 보는 것으로도 발전이지만, 만약 그 쌍의 측면을 함께 인식하고 '동일시'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면, 이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자유를 얻는 경험이 됩니다.)
이것은 비-존재로 가장 강력하게 끌어당기는 요소이면서, 사람들의 의식이 과거에 얽매이거나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끌어 당겨져 현재에 존재할 수 없게 되는 가장 핵심 이유 중에 하나입니다.
사람들에게 과거나 미래로 끌고 가는 분리된 자아를 알아차리고 그것으로부터 빠져나오도록 돕지 않고 단순히 "지금 이순간, 현재에 존재하라" 라고 말하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두 번째 이해: 창조적으로 되겠다는 결정에서 시작하기
또 하나의 쌍쌍의 측면으로, 무력감을 느끼는 분리된 자아가 있을 수 있고, 무력감을 느끼는 보상으로 슈퍼히어로의 이미지를 만드는 분리된 자아가 있을 수 있습니다.
'변화 없는 어떤 궁극적인 상태에 도달하는 것을 인생 목표로 하는 것', '자기초월에 대한 부정', '내면에서 아는 능력을 부정하고 강력한 지도자를 따를 필요가 있다는 결정', 세상을 구원할 슈퍼히어로에 대한 투사, 그리고 자신이 그런 슈퍼히어로가 되고자 하는 꿈, 모두 사실은 분리된 자아의 투사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는 실수는 특정 문제를 '해결'하려는 생각에만 갇혀서, 그 문제 배후에 있는 의식에 대해 살펴보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분리된 자아의 포기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자기 초월을 포기하려는 마음에 개인이 자신을 여는 순간, 의식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안타깝게도 비-의지와 비-존재라는 집단적 힘의 영향력에 함께 마음을 열게 됩니다.
이 집단적 힘은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사람들의 분리된 자아에 의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개인보다 더 강력합니다. 개인이 처음 그것을 자신의 존재에 허용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는 그것에 의해 완전히 압도될 수도 있습니다.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하여 삶의 오랜 시간 동안 투쟁이 있었지만, 별 소용이 없다고 여겨지고, 이후 사람들이 포기하는 시점에 이르러,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이런 노력들이 다 무슨 소용인가?"
길은 잃은 것과도 같은 상태에 빠지지만, 그것을 깨닫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영원히 길을 잃는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먼저 의지가 매우 강력한 원동력이라는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삶과 창조성의 포기의 측면과 연결하여 스스로 알아차릴 수 있다면, 죽음에 대한 의식을 버리고 다시 '지속적인 자기초월로 향하겠다' 혹은 '창조력을 발휘하겠다'고 결심할 수 있다면, 그것을 넘어서는 것이 가능합니다.
일단 창조적으로 되겠다는 결정에서부터 시작할 필요가 있습니다. "창의력을 발휘하고 표현하겠다", "분리된 자아를 버리고 연결감 속에서 무언가를 배우겠다"고 선언함으로써 그 의지를 명확하게 할 때, 그리고 지속적으로 인식할 때, 비의지와 비존재의 끌어당김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시작합니다.
그렇다면 창조적으로 되겠다는 말은 무엇을 뜻하는 걸까요?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의식 성장의 끊임없는 흐름'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세 번째 이해: 의식 성장의 흐름(창조성)
먼저 의식 성장의 흐름이란, 위로 향하는 끊임없는 변화의 흐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삶은 성장의 중요한 기회이고, 여러분이 인식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모든 이들은 자신을 초월하도록 끌어 당겨지고 있습니다.
집단 의식의 흐름이 외부 조건에 의존하는 이원적 고통인 것에 비해서, 상향하는 자기 초월적 힘은 이원적인 행복과 고통을 넘어서는, 초월적 힘이자 기쁨입니다.
아래에서 더 언급드리겠지만 '지속적인 자기 초월', 이것은 창조의 첫 번째 목표입니다. 창조주의 개별적 확장들로서 자의식을 성장하는 것, 이것은 흐름이고, 인간에게 본래 주어진 삶의 임무입니다.
사람들은 이 힘과 '흐름'을 두고 성령 혹은 그리스도 의식, 생명의 강, 하나됨, 불성, 우주 의식이라고 언급하기도 합니다. (각자 신념 체계에 따라 편한 용어를 쓰시면 됩니다.) 자신을 기꺼이 초월하여 더 많은 빛과 아이디어를 가져오는 개인 차원의 자기 초월이 있으며, 이것이 집단적 자기 초월로 이어집니다. 삶과 영적 여정의 진정한 목표는 어떠한 면에서, 자신의 의식을 자기 초월이라는 창조의 목적에 고정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네 번째 이해: 창의성의 더 높은 단계와 과정 의식하기
많은 경우에 사람들은 창의성을 예술과 관련 짓습니다. 본질적으로 틀린 것은 아니지만, 이것은 창의성에 대한 일부 개념에만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술가들의 접근은 흔히 두 가지 중 하나일 수 있습니다.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무언가를 창조하고, 그것이 분리된 마음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매우 흔한 일입니다. 자신의 작업물이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면 특별하다고 느끼고, 그것이 창의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한편에서, 자신의 마음만으로는 충분히 창의적일 수 없다고 생각하여 더 높은 영감을 얻기 위해 스스로를 개방하는 예술가들도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을 분리된 존재로 보는 것에 갇혀 있을 때 영감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요? 그것은 종종 감정 영역, 멘탈 영역 또는 몇몇 경우에는 낮은 정체성 영역에서 나오기도 합니다. 이것을 통해 삶의 일부 측면을 개선하는 실용적인 발명품이 나오기도 했고, 반드시 꼭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간 놓쳐온 것, 삶에는 더 높은 창조성의 단계들이 있다는 것을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창의성의 더 높은 형태로서, 점점 더 의식화될 수 있는 여러 단계가 있습니다. 창의성의 더 높은 단계와 과정을 의식하게 될 수록 점점 더 중립적이 될 수 있습니다. 즉, 더 잘 인식하게 되고 직관력이 향상될 수록, 외적인 마음의 내용물들이 창의성을 제한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은 자라오면서 인간이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특정 문화적 인식필터를 오랫동안 경험해 왔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자랐기 때문에, 그동안에는 그 틀 안에서 창의력을 발휘해 왔지만, 이제 이것이 제한으로 느껴지기 시작하는 시점이 올 것입니다. 그 때 자신을 돌아보고 집단의식 또는 문화적 프로그래밍이라고 부를 수도 있는 제약들에서 벗어나 점점 더 중립적이 될 수 있습니다. 창의성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에 대한 편견이 점점 줄어들고 한계에 대한 감각이 점점 줄어들게 됩니다. 여러분이 점점 더 중립적이 될수록, 여러분은 점점 더 열린 문이 되고, 이것은 여러분이 '더 위대한 힘'에 연결되어 더 많은 것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의식적으로 자신을 열어 새로운 아이디어, 실용적인 발명품이나 음악, 이미지, 또는 비건설적인 사항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더 나은 삶으로 개선할 수 있을지 등의 관점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인간이 영적인 존재라는 것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없는 사람들도, 자신의 상위 자아에 연결되어, 이미 알고 있는 것을 기반으로 하는, 무언가를 가져 오는 것이 실제 가능합니다. 그것은 여전히 창조적이고, 어떤 식으로든 삶을 개선할 수 있으며, 하나됨과의 특정한 연결입니다. 그러나 그것 역시도 그들 마음의 내용과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 프로그래밍에 의해 제한될 수 있습니다.
다섯 번째 이해: 내적 연결감의 중요성
창조는 신의 의지입니다. 모든 형태의 세계는 창조주가 창조 의지를 공식화하는 것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창조주께서는 먼저 자기 자신을 보완적인 두 개의 극성들로 표현하셨습니다. 이것은 알파와 오메가, 확장과 수축, 음과 양으로, 남성과 여성으로 불릴 수 있습니다. (많은 예술 작품들에서 이것을 주제로 표현하고자 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두 개의 극성들은 서로 상반되는 것이 아니라, 상호 보완하는 힘입니다. 어떤 창조물에 '지속가능성'을 부여하려면, 두 가지를 서로 분리할 수 없다는 것에 주목하세요. 어떠한 형태이든 간에, 형태가 유지되려면 두 개의 힘이 균형을 이룬 채 결합해서 창조됩니다. 따라서 모든 형태 속에는 이러한 두 개의 측면이 존재합니다.
형태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창조주의 표현입니다. 신의 존재가 모든 것들 속에 새겨져 있다는 말씀입니다.
창조된 모든 것 안에 신이 있다는 것을 보는 것은, 사람에게 있어 다른 이들과 지구 어머니와의 강한 연결감을 줍니다.
진동수의 차이가 있을 뿐, 다른 것들과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분리는 인식필터의 산물이지, 실질적인 분리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대는 자신을 그저 독립된 작은 일부라고만 생각할 수 있지만, 그대 안에는 가장 거대한 우주가 들어 있습니다. 여러분의 핵심, 즉 순수의식은 육체적 경험을 하는 영적 존재로서, 신의 확장입니다.
사람들이 흔히 '신이 없다'라고 말하는 것은, 의식을 수직으로(위로) 이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수직적인 삶이 무엇인지'에 대해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을 이해하는데 하나라는 '연결감'이 큰 역할을 합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수직적 연결감과 수평적 연결감이 있습니다. 보통 에너지는 밖으로, 즉 아래로 흐릅니다. 여러분은 이제 그것을 안으로, 즉 위로 돌리는 법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대의 주의력(에너지)이 일단 내면으로 향하기 시작하면, 그대는 에너지의 동그라미가 됩니다. 이것이 위로 향하는 이해 중 하나입니다. 자신에게 적용해 보는 걸 시도할 수 있다면, 여러분 안에 흘러 나가기만 하던 빛이 이제는 흘러들어와 채워지기 시작하고, 이것은 순환하는 원이 됩니다. 사람을 병적으로 분열되지 않고 온전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이 원(circle)이랍니다. 사람에게 진정한 휴식과 이완을 주는 것도 이 원입니다.
하나됨의 법칙과 자유의지의 법칙이 균형을 이뤄야 한다는 측면에서, 먼저 수직적인 하나됨 이후에, 자연스럽게 수평적인 하나됨도 이루어집니다. 연결감에 대해 분명한 사실 한 가지는, 모든 사람이 지속적인 자기 초월의 흐름에 연결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녔다는 것입니다. 이 흐름에 마음을 열면, 누구나 이 에너지와 연결되고, 개개인의 열림에 따라 그 에너지가 개인을 통해 표현되고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대가 그것을 표현하도록 '허용'할 때, 그대는 점차 그 연결을 느끼게 될 것이고, 이것은 분리된 자아가 가지는 외로움을 초월합니다. 방금 허용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음을 기억하세요. 이 흐름의 에너지에 연결되는 것을 허용함으로써, 여러분들이 한평생 속박되어 있던 것으로부터(그것이 어떤 심리이든, 상황이든) 풀려나 실제 이동하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의미이고, 그에 대한 경험과 지혜로서, 보이는 것 너머 더 높은 준거틀을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본래 주어진 창의성의 기본적 형태가 '의식성장의 흐름에 연결되어, 지속적인 자기초월로 나아가는 것'임을 이해한 다음, 그것을 삶에서 실제 경험하는 것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속적으로 경험과 연결을 더 확장해 나가면, 자신의 믿음이나 종교와 상관없이, 진정한 영적 스승들을 인식하는 시점이 올 수도 있을 것입니다.
자신을 연결된 존재로 볼 때, 삶의 진정한 본래 목적과 창조적으로 되는 것이 무엇인지, 종교나 믿음을 떠나 그것이 '경험'으로 이해되어집니다.
여러분들 모두는 외형을 넘어서, 그대 자신과 사회에 도움이 될, 영감을 받고 아이디어를 끌어오는 열린 문(open door)이 될 잠재력을 지녔습니다. 여러분께서 낡은 것을 기꺼이 버리고 마음의 문을 열어, 더 높은 이해와 비전, 더 높은 자각을 받아들이겠다고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앤코이는 여러분들이 그러한 용기를 발휘할 수 있길 바랍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존재와 의지에 대한 '포기'가 아니라, 분리 의식에 대한 포기를 택하고, 지속적인 자기 초월을 배워 그것을 '가속'하는 것이랍니다. 자신이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드신다면, 실험해 보십시오. 여러분 내면에 지속적으로 초월할 열정과 에너지가 채워지는지 말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심리와 그 심리에서 해결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통찰과 영감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영적인 존재로서 직관에 조율하는, '창조성의 더 높은 단계'에 대한 보다 높은 이해입니다.
여섯 번째 이해: 하나됨, 사랑의 법칙
재단은 신청자격에 '하나'로서 연결되어 있다는 전체의식을 언급한 바 있고, 이것이 사랑의 두 가지 법칙에 의해 나온 것이라는 이해를 드리고자 합니다. 이것을 이해하는데 있어, 사랑을 단순히 인간적 사랑으로만 이해하는 것을 넘어서는 확장된 인식을 필요로 합니다. 여러분은 무언가 되돌아 오는 것을 기대하고 요구하게 되는, 조건적 사랑으로 흐르는 많은 형태를 주변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적인 사랑이 통제와 소유욕, 즉 기준과 조건으로 왜곡되기 쉽다는 것을 꼭 인식하세요.
신은 곧 사랑이고, 왜곡 없는 참 사랑은 특정 대상을 소유할 필요가 없고 아무 조건없이 자신을 표현하고 성장하면서 끊임없이 흐르는 것입니다. 그 흐름을 통해 그 자체로 기쁨을 얻습니다. 태양이 모든 것을 비추듯, 모든 생명을 향합니다.
사랑에는 더 확장된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알파 측면은 확장하는 힘을 말하고, 오메가 측면은 수축하는 힘에 해당합니다. 사랑의 알파 측면은 그 이상이 되는 법칙이며, 자기 초월의 법칙입니다.
그 이상의 법칙(the Law of More)은 여러분이 정지 상태나, 중간 상태(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회색 지대)에 머물지 않고 이동할 권리를 갖고 있다는 말입니다.
오메가 측면은 하나됨의 법칙(the Law of ONE)이며, 이것은 모든 생명이 같은 근원에서 왔기 때문에, 가장 깊은 수준에서 연결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모든 생명은 생명의 강인 전체, 즉 '상호 연결된 하나'로서 앞으로 나아가고 성장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이상의 법칙'과 '하나됨의 법칙'은 창조의 궁극적 목표를 향한 균형잡힌 성장을 유지하도록 함께 결합하여 작동됩니다. 그 이상의 법칙은 성장하여 이동하게 하고, 하나됨의 법칙이 이런 움직임을 점진적이고 균형잡게 해줍니다. 이 법칙은 여러분의 창조적 자유를 제한하지는 않는 선에서, 여러분 모두를 중심과 균형을 향해 방향을 돌리게끔 끌어당깁니다.
정리하자면, 하나됨은 모든 생명이 연결됨, 즉 모든 것이 의식 안에서 연결되어 있다는 사랑의 법칙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기억하기 쉽도록 시각적으로 이미지화할 수 있는 것은, '흐르는 강물'입니다.
흐르는 강물은 장애물을 만나도 언제나 다시 제 갈 길을 갑니다.
바위를 만나면 한번 부서졌다가도 다시 돌고 돌아서 흘러갑니다.
길이 없으면 때로는 없는 길을 만들면서 나아가지요.
모든 강줄기는 바다에서 만난답니다.
생명력이 약동하는 흐르는 강물처럼 우리 인생의 여정도 이와 같습니다.
일곱 번째 이해: 생명의 강과 연결되어 '홀로'라는 외로움을 극복하세요.
생명의 강에 마음을 열고,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해 온 수많은 이들이 여러분 앞에 만들어 놓은 그 추진력에 동참하세요. 뭔가를 개선하려는 특정 노력에 있어 여러분들이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아홉 번째 이해: 초점을 이동하는 능력
우리가 여러분의 핵심이라고 언급드렸던, '순수인식'의 하나의 측면은, 의식의 초점입니다. 그리고 이 순수 인식은 자신이 어디에 초점을 두고 집중했느냐에 따라, 여러분이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그것과 동일시하는 경험을 합니다. 하지만 동일시하는 측면이 있다 하더라도, 여전히 의식의 초점일 뿐이므로, 여러분이 곧 그 분리된 자아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 분리된 자아 자아가 아무리 강하고, 그 자아에 여러분이 아무리 오랜시간 동일시되더라도, 진정한 여러분의 핵심으로서 순수인식은 단 한번도 손상되거나 훼손된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자신에게 초점을 전환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앉아서 TV를 보거나, 영화에 몰두하고 있는데 밖에서 큰 소음이 들리면, 여러분은 즉시 그 소음으로 주의를 돌립니다. 여러분은 영화에서 바깥의 소음으로 초점을 이동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하고 있는 일입니다. 그것이 바로 순수인식, '의식하는 자아' 측면이 실제로 하고 있는 일이며, 초점을 이동하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에 몰입단계에 있을 때, 무의식적으로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여러분은 무의식적으로 여러분의 초점을 이것에서 저것으로 다음 것으로 옮기고 있습니다.
자, 직관지능을 끌어올릴 수록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초점을 이동할 수 있는 능력을 의식하고 더 잘 적용하게 됩니다. 외적인 조건이나 네 하위체의 내적인 조건에 의해 이리저리 초점이 끌려 다니는 대신, 어디에 주의를 집중할 지 의식적으로 결정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러분에게 진정한 자신이 중립적인 순수인식이며, 분리된 자아나 에고가 아니라고 말씀 드린 바 있습니다. 이런 사실을 경험으로 이해하기 시작할 때, 여러분은 하나의 분리된 자아에서 다시 순수의식으로 초점을 이동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점점 더 의식할수록 점점 더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열 번째 이해: 초점 해제 (dis-focus) 상태
영성가들은 대개 '나', '나의 것'이라는 관념을 내려놓으라고 강조합니다. 자신을 순수의식으로 경험할 때 여러분은 자아가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여러 시대에 걸쳐 많은 사람들이 현대의 비 이원성 운동에서 말하는 무(無)나 공(空) 혹은 무아(無我)를 경험하는 것, 또는 생각 없음에 마음이 이끌렸습니다.
만약 의식을 특정 위치로 옮기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초점을 해제하면 어떻게 되나요? 특정한 위치 감각이나 자아 감각이 없어집니다. 일종의 자아감 상실입니다.
그런데 처음에 이 순수 인식이 왜 존재하게 되었을까요? 신의 개체화, 확장이 형태 세계에 특정 경험을 함으로써, 지속적인 자기 초월을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형태의 세계에서 형태를 가진 모든 것은 특정 위치, 특정 국지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순수 인식은 특정 위치에 집중하여 특정 경험을 제공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순수 인식의 초점을 해제하고 인위적인 무나 무아의 상태에 빠지면 어떻게 될까요? 자, 여러분은 연속성을 상실합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누구인지 잃어버립니다.
분리된 자아와의 동일시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자아를 순수인식, 중립적 모드에서 살펴봐야 합니다. 그 분리된 자아 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환영을 보고 환영을 놓아버리는 작업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단순히 연속성을 상실한 무아의 상태에 있다면, 그런 작업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열한 번째 이해: 더 높은 자아로 초점 이동하기
사람들에게는 에고가 사라지는 것에 대해 일반적인 두려움이 존재합니다. 에고와 자신을 동일시하기 때문에 에고가 사라지는 것을 자신이 사라지는 것처럼 느낍니다. 그러나 에고와의 동일시가 사라지면, 처음으로 '진정한 자신'이 드러날 것입니다.
여러분이 연속성을 상실한 무아의 경험에 대해 미리 염려하거나, 이미 그런 경험을 했다면 대안은 무엇일까요? 대안은 그 상태의 오류, 그 상태의 비실재성을 깨닫는 것입니다. '나'라는 관념을 내려놓으라고 했던 것은, 더 큰 자아를 자각하여 그대의 인식을 확장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여러분의 상위 자아나 여러분의 신적 자아로 초점을 바로 이동할 수 없다면, 먼저 자신의 분리된 자아와의 동일시를 해제하는 것부터 시작하세요. 심리작업을 통해 이 자아들을 점점 해체하고 놓아버리세요. 그리고 여러분이 점점 더 많은 분리된 자아를 해체 할수록 의식하는 자아가 더욱더 자유롭게 집중하고 싶은 곳을 의식적으로 선택할 수 있고, 그러면 연결성을 회복하는 것이 더 쉬워집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신적 자아보다 영적 스승들에게 집중하기가 더 쉬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성장, 더 높은 의식 상태는 초점을 해제하여 무(無)가 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자아에서 이 세상 너머의 더 큰 자아로 여러분의 초점을 이동하는 문제입니다.
이것은 순수 인식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 또한 아닙니다. 순수인식이 자신이 신적 자아임을 깨닫고, 신과 결코 분리된 적이 없었음을 깨닫는다는 의미입니다. 의식하는 자아, 순수인식은 단지 초점, 즉 형태 세계에서 신적 자아의 국지적인 초점이었을 뿐입니다.
다시 말해, 순수인식이 형태의 세계에서 하고 있는 여정의 목적은, 먼저 주의와 초점을 세상을 향하도록 허용한 다음, 세상과 정체성, 멘탈, 감정체 및 육체와의 동일시에서 깨어나, 의식적으로 주의를 신적 자아나 진정한 영적 스승에게로 이동하는 법을 배워, 주의를 외면이나 아래의 방향이 아닌, 위로 끌어올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열두 번째 이해: 의식 성장이라는 변형 과정에서 생기는 일들
의식성장의 실제 여정은 미래의 어떤 궁극적인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 아닙니다.
현재의 삶과 경험을 개선하고, 거기에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다음 단계를 위한 도약판으로 활용하고, 더 높은 자아 의식을 향해 계속해서 다음 단계를 밟고, 그렇게 항상 더 '이상'(more)으로 향하는 과정입니다.
또한 지금 경험하는 자유보다 더 자유로울 수 있음을 알고 자아감을 확장하여 현재 의식을 넘어서는, 계속되는 흐름입니다.
재단은 의식 성장을 향해 확고히 나아가겠다고 선언해 주신, 소중한 한 분 한 분을 사랑합니다. 그렇기에 마치 사랑이 담긴 편지를 건네는 "엄빠"의 마음으로, 의식성장에 진지하게 임하는 분들께 이 말씀을 올립니다. 의식 성장이라는 변형 과정의 각 단계에서 생길 일들을 미리 알아둔다고 해서 단계를 생략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지만, 어쩌면 그대는 과정을 더 쉽게 통과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뭔가 다른 더 흥미로운 것을 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외면의 마음으로 주변에 주의를 끌어당기는 것들에 중독된 측면이 일부 원인으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집단의식의 밀도가 높고, 그것이 여러분을 집단의식에 순응하게 하는, 하향으로 끌어당기는 힘임을 인식하세요. 많은 사람들이 내면에 주의를 돌리는 것이 어려운 이유랍니다. 그것을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여러분은 그 힘에서 거리를 두게 됩니다.
일단 내면에 주의를 기울이기로 결심하면, 여러분은 가속하는 에너지를 접하게 됩니다. 의식 성장 초기 단계에 가속화하는 에너지를 접하면, 처음엔 높은 주파수의 에너지가 여러분의 잠재의식 속에 오랜 시간 억압됐던 두려움들을 밖으로 튀어나오게 하여 혼란을 일으키기도 하고, 이질감과 불편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때문에 무의식중에 그것을 억누르고 거부하고 싶어지기도 합니다.
그대는 이때 '생명의 강 흐름'(하나됨)을 따라 부드럽고 신속하게 이동해나갈 것인지, 아니면 스스로 지어낸 고통과 시련들 속에서 오락가락하며 떠밀리듯 진화해갈 것인지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됩니다.
만약 그대가 두려움 속에서 저항하면, 무의식은 내면의 정체되어 있던 에너지가 더 눈에 띄도록 부각시키는 경우가 있습니다. 처음에 이것을 마주하는 일이 많이 고통스럽고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풀려나는 과정의 일부이고, 초기 고통을 직면하고 앞으로 나아가면, 더 자유로워지고 가벼워지는 경험을 하시게 됩니다.
이 과정을 이겨내고 신청서를 완료했던 많은 신청자분들께서 "에너지가 충전되는 느낌을 얻었다."고 말씀하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혹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신청자들께서 이것을 알고 표현하신 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앤코이 신청서와 게시글들은 여러분들의 직관을 향상시키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직관은 사실 에너지와 상관관계가 높습니다.
직관을 어떻게 적용하는지에 대한 질문에 이 반응을 자주 보실 수 있습니다.
"그냥 마음 가는 대로, 좋게 느끼는 대로 살라는 거 아녜요? 저 이미 잘하고 있는데요?"
아쉽게도 그렇지 않습니다. 감정적 충동은 직관과 거리가 멉니다.
직관은 '편안한 길'이 아니라 '에너지 법칙에 상응하는 길'입니다. 위에 언급된 법칙들을 한번쯤은 숙고해 보세요.
직관을 키우는 방법은 항상 밖으로만 향하던 주의력을 안으로 돌려 '내면의 소리'에 귀기울이는 것입니다. 자신을 찬찬이 들여다 보는 것, 거기서부터가 시작입니다.
여러분들 중 많은 이들이 섬광같은 일별을 실제 경험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빛을 보기 시작한 이후로, 삶을 살아가는 동안 여전히 다른 사람들의 두려움에 영향을 받을 수도 있고, 때로는 여러가지 사회적 통념과도 맞서게 되실 겁니다.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면, 두 걸음 뒤로 밀리는, 제자리로 뒷걸음질 할 수 있습니다. 이것 자체가 사실 자연스러운 현상임을 인식하세요. 그대가 반복적으로 더 나은 선택을 통해, 기존 습관을 끊어내는 과정임을 알아차리는 것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심리 치유는 평생의 과정임을 인식하고 나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과정에서 에고가 영적 성장을 부정적인 것으로 바꾸어 성장을 중단하도록 시도할 때 그것을 알아차리는 시간, 그래서 여러분이 중심 안에서 균형을 잡는 시간들을 좀 가지실 필요가 있습니다.
나아가는 과정에서 한편으로는 그냥 포기하거나, 이것으로부터 주의를 돌릴 많은 것들, 혹은 내면의 심리 작업의 어려움 없이도 외적인 구원을 약속하는 것 등에 끌리는 경우도 발생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 중에 일별을 경험해 봤지만, 아직 경험과 분별력을 충분히 쌓기 전이라면, 외면의 마음으로 주의를 끌어당기는 것들에 여전히 끌릴 수 있습니다. 그 중에는 온갖 종류의 반짝임과 우월성으로 이야기하는(매우 정교하고 난해한 방식으로 이야기하는, 혹은 감정체, 멘탈체, 정체성체의 낮은 영역에서 나온) 많은 가르침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이에 매력을 느끼고 이끌릴 수도 있다는 것을 인식해 두세요.
또한 궁극의 경지로 인도한다고 주장하지만, 실은 점점 더 깊은 환상으로 데려가는, 수많은 거짓된 여정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을 인식하는 것은, 그 과정마저도 왜 자신이 거기에 끌렸는가에 대한 자신의 심리를 깨닫고 교훈을 얻는, 성장 과정으로 전환하기 위함입니다. 더불어 높은 분별력이 필요해지는 미묘한 여정에서, 많은 시행착오를 줄이는데 결정적인 도움이 될 수도 있습니다.
분별력을 발휘하여 보다 가장 기억해 두셔야 할 것은, 세상의 기준과 다르게, 진정한 영적 여정은 그렇게 복잡하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많은 세상 사람들의 판단 기준에서라면 별로 영광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의식 성장은 인기 대회가 아니랍니다. ^^ 거창한 돌파구나 영광스러운 깨달음이란 없습니다.
영적 여정의 더 높은 곳에 도달하게 되면, 세상의 즐거움보다 더 이상의 것을 원하는 영혼의 갈망을 깨닫기 시작하는 지점이 옵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 길에서 지속적으로 더 높이 올라간다면, 이원성의 대조가 점점 줄어드는 것을 경험하시게 됩니다. 슬픔과 분노, 열등감을 비롯한 고통이 점점 작게 줄어 들지만,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우월감, 인위적인 의기양양함도 동시에 사라집니다. 자신이 특별하다고 주장하지도, 그렇게 느끼지도 않습니다. 매우 중립적인 마음 상태입니다. 지속적인 기쁨과 성취감으로 지복과 에너지 충만을 느끼겠지만, 이것은 극성을 초월한 것이고, 진정한 자신을 되찾는데 자연스레 따라오는 것들입니다.